김기춘 청와대 비서실장의 취임 첫 일성은 “윗분의 뜻을 받들어”였다. 며칠 전 민주당에 박근혜 대통령과 여야 대표들의 3자 회담 제의를 하면서도 “윗분의 말씀만 전할 뿐 다른 말을 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윗분을 한자로 옮기면 상(上)이 된다. 바로 임금이다. <조선왕조실록> 등을 보면 ‘상께서 이르시기를’ ‘상께서 선정전에 나아가 인견하고 이내 묻기를’ ‘상이 날로 수척해지고 오랫동안 평안치 못하여 아랫사람들이 근심하였다’는 등의 표현이 넘쳐난다. ‘윗분’이라는 김 실장의 극존칭 어법에서는 궁전의 섬돌 밑에서 머리를 조아리는 신하의 깍듯한 자세가 전해온다.
채동욱 검찰총장의 축출도 상의 뜻과 결코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상께서 “채동욱을 파직시키라”는 전교를 직접 내리지 않았을 수는 있다. 사실 그럴 필요도 없다. ‘채아무개의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용안에 언짢은 기색이 흘렀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채 총장이 역린을 건드린 죄는 그만큼 무거웠다. “성심(聖心)이 상한 것을 접하고 아랫사람들이 몸 둘 바를 모르며 진땀을 흘렸을” 것이다. 채 총장 ‘기획낙마’를 주도한 사람이 김기춘 실장이라는 관측이 나오는 것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정치적 반대파를 밀어내는 데 흔히 사용하는 수법이 탄핵상소다. 이번에도 자신들과 뜻을 같이하는 유생(조선일보)을 전면에 내세워 채 총장을 벌해야 한다는 탄핵상소를 올리게 했다. 그리고 채 총장의 신원(伸寃) 노력 결과도 지켜보지 않고 의금부가 직접 국문에 나서겠다고 해서 기어코 밀어냈다. 하지만 윗분의 뜻을 받드는 사람들이 놓치는 것이 있으니 윗분 위에 ‘진정한 윗분’이 있다는 사실이다. 바로 하늘이고 국민이다. 채 총장의 사의 표명 이후 번지고 있는 거센 역풍은 진정한 윗분들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준다. 급기야 윗분의 거소 쪽에서는 “상께서 언제 물러나라 했느냐. 진상 규명이 중요하다 했지”라는 궁색한 반응이 나왔다. 참으로 비열하다.
김종구 논설위원 kj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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