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철희 두문정치전략연구소장
힘들었으리라. 임기가 있지만 집권세력과 맞서는 모양새가 빚어졌으니 마음고생이 적지 않았을 게다. 검찰의 독립성이란 것도 따지고 보면 권력이 검찰을 제어하지 않을 때 명실공히 보장된다. 행정부에 속해 있는데다, 장관이 인사권을 갖는 시스템에선 제도적인 독립도 어렵지만 하루가 멀다 하고 정치적 사안이 검찰의 손에 주어지는 형국이면 더더욱 검찰에 가해질 압박이 거세질 수밖에 없다. 이런데도 검찰총장으로서 채동욱은 잘 해냈다.
박근혜 정부는 김기춘-남재준 체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의 육법당이 재현됐다. ‘육’이 의제를 던지면 ‘법’이 관리하는 시스템인데, 그 본질은 타협과 공존보다 독주와 배제에 있다. 정부 출범 6개월 동안 핵심 어젠다는 국정원에 의해 관리되고 있다. 정상회담 대화록 국면이 그랬고, 이석기 사태가 그렇다. 최근의 검찰총장에게 혼외자가 있다는 논란도 그 배후로 국정원이 거론되고 있다.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국정원이 정국 운영의 주축으로 기능하는 건 분명해 보인다.
문제는 관리인데, 그래서 등장한 것이 김기춘 비서실장, 홍경식 민정수석이다. 전임자인 허태열 실장과 곽상도 민정수석은 검찰이 ‘국정원이 선거에 개입했다’는 수사 결과를 발표하는 걸 막지 못했다. 국정원의 선거 개입이 검찰에 의해 ‘사실’로 확인되면서 박근혜 대통령의 정통성에 흠집이 가해졌다. 청와대의 입장에서 보자면, 검찰의 수사 때문에 촛불집회가 생겨났고, 국회의 국정조사와 야당의 장외투쟁으로 이어졌다. 이런 인식에서 김기춘-홍경식 라인업이 등장했다. 이들의 첫째 임무는 검찰 통제이고, 이는 곧 검찰총장을 찍어내는 것이었다.
채 총장이 강하게 밀어붙여 결국 백기 항복을 얻어낸 전두환 전 대통령의 미납 추징금 문제도 청와대의 눈으로 보면 달갑지 않다. 이 건으로 채 총장에 대한 국민적 신뢰가 높아지는 게 부담이다. 총장이 정권이 아니라 국민을 의식하기 시작하면 검찰을 제대로 통제하기란 더 어려워진다. 전 전 대통령 쪽도 채 총장을 겨냥한 물밑 공세에 들어갔을 것이다. 이번에 할 수 없이 돈은 내지만 상황을 이렇게 몰고 간 인물만큼은 ‘응징’하고 싶었을 것이다. 김기춘 실장이 유신 때부터 잘나갔던 사람이라 전 전 대통령 쪽과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했으리라. 이래저래 채 총장은 위태로운 상황에 내몰렸다.
그래도 아쉽다. 검찰의 수장으로서 검찰 흔들기에 맞서야 했다. 스스로도 혼외자 보도에 “검찰총장으로서 검찰을 흔들고자 하는 일체의 시도들에 대해 굳건히 대처하면서 오로지 법과 원칙에 따라 검찰 본연의 직무 수행을 위해 끝까지 매진하겠다”고 하지 않았나. 총장직에 미련을 두라는 게 아니다. 총장이 버팀으로써 검찰의 독립성을 다지는 역사적 계기가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사퇴하지 않았다면 전방위 공세가 이어졌을 것이다. 또다른 의혹이 제기될 수도 있고, 장관의 인사권 행사로 총장을 고립시킬 가능성도 있었다. 그럼에도 ‘임명’된 총장이 아니라 ‘추천’된 총장으로서 밀알이 되는 길을 선택하지 않은 건 매우 아쉽다.
박근혜 정부는 하늘이 두 쪽 나도 2018년 2월24일이면 끝난다. 아무리 강고한 통제 체제를 구축해도 딱 5년 동안이다. 박정희 모델이라는 것도 18년 장기집권이었기에 가능했다. 섣부른 따라하기는 화를 부르기 쉽다. 또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그 어떤 통제도 먹히지 않는다. 하물며 국민소득 2만달러 시대에 막고 누르는 통제가 지속가능하다고 보는 건 위험한 착각이다. 꿈 깨는 게 좋다. ‘오버하면 다친다.’ 이게 거친 현대사가 말해주는 우리 정치의 제1법칙이다.
이철희 두문정치전략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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