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사과 작가
모델 김다울이 세상을 떠난 지 4년이 지났다. 살아있던 시절의 그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지만 많은 유명인들의 죽음 가운데에서 그의 것이 유독 마음에 걸렸다. 성큼성큼 해가 짧아지며 겨울에 다가서는, 한해 가장 쓸쓸한 시기의 소식이라서 그랬는지, 마침 그가 가장 사랑하던 장르의 음악에 나 또한 깊이 빠져 있던 시기라서 그랬는지, 반복되는 여행 속에서 소모되는 마음에 대한 동감에서 비롯된 것인지 혹은 그 모든 이유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랬다.
인터넷에 흩어져 있는 그의 흔적을 뒤늦게 더듬기 시작했을 때 안타깝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아쉬움과 후회는 한번이라도 선망해본 적 있는 것에만 해당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너무 일찍 사라졌고, 나는 너무 늦게 도착했다. 물론 그 어떤 것도 그가 아름다운 인간이었다는 사실을, 우리가 다시 한번 그런 존재를 갖게 될 가능성은 0에 가깝다는 것을 숨겨주지는 못한다. 대부분의 탁월한 사람들이 그렇듯 그는 너무 일찍 도착했다. 그는 기품있는 걸음걸이가 뭔지 아는 모델이었고, 좋은 음악을 알아보는 귀를 가진 리스너였고, 조세희와 미셸 우엘베크를 읽는 희귀한 젊은 독자였으며, 우디 앨런을 싫어할 줄 아는 멋진 여자였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지구에서 가장 화려한 상품 세계에 둘러싸여 있었다. 아니 그 세계의 일부가 되어야 했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최선을 다해 해냈다. 나는 기적이란 그가 거기까지 버틴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가 불행했을 거라고 믿지 않는다. 그가 파도에 휩쓸리듯 이리저리 흔들거리는 무의지의 삶을 살았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주체적으로 자신이 살아갈 삶을 선택했고, 그것을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냈다. 슬픈 끝이 언제나 슬픈 과정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곁을 끝없이 맴돌았던, 혹은 그랬을 것이라고 내가 억측하는, 하나의 커다란 불안에 대해서 입을 다물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몰락에 관한 소문이 온 세상에 스모그처럼 짙게 퍼져 있는 가운데, 온갖 종류의 이론과 가설들이 그 소문 사이를 헤집고 다닌다. 누군가는 노동에 대해, 누군가는 소비에 대해, 또 누군가는 사회에 대해, 그리고 또 누군가는 혁명에 대해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러는 동안에도 우리와 가장 가까운 곳, 너무나 가까워서 더욱 깊은 어둠 속에서, 우리 아이들의 존재와 삶이 통째로 상품이 되어가는 현실에 대한 이야기는 잘 들리지 않는다.
상품적 불안. 그것은 팔리지 않는다면 실현될 기회조차 갖지 못하는 우리 아이들의 부서질 듯 연약한 존재상태에서 스며 나오는 절망의 흔적이다. 물론 이것 또한 상품으로 거듭날 기회를 가진 운 좋은 아이들의 이야기다. 상품으로 거듭날 기회조차 갖지 못한 아이들은 공장 앞에 줄을 선 채-상품을 만들어내는 노동자가 아니라 상품의 재료가 되기 위해-제발 그 줄이 내 앞에서 끊기지 않기를 기도한다. 자주 열리지 않는 기회 앞에서 감사해하고 또 감사해한다. 우리 앞에 놓인 세계가 화려해질수록, 우리가 그 화려한 상품세계에 황홀해할수록, 상품이 되어버린, 상품이 되고자 하는, 그리고 필사적으로 상품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다시 말해 인간이길 원하는 아이들의 불안으로 세계는 터질 듯 부풀어오를 것이다. 그 불안을 가라앉히지 못한다면, 이따금 전원이 꺼지듯 사라져버리는 아이들을 향한 우리들의 애도는 언제나 무력할 것이다.
김사과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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