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석구 논설위원실장
“10년이 아니라 30년은 후퇴할 것이다. 외국사람 보기 부끄러워 대한민국 국적을 포기할까 한다.” 엊그제 늦은 밤 저 멀리 아프리카에서 국제전화를 걸어온 친구는 대뜸 목소리부터 높였다. 박근혜 후보가 각종 여론조사에서 앞선다는 게 있을 수 있는 일이냐며 통화 내내 탄식과 분노를 쏟아냈다. 위로한답시고 “그래도 기대해 보라”고 했지만 “그런 한가한 소리나 할 때냐”며 깊은 한숨을 내쉬고 전화를 끊었다.
대선 투표일이 가까워지면서 종종 나라밖 지인들이 대선 판세를 물어오는 경우가 있다. 박 후보 우세에 대해 우려하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이들은 이번 대선에서 한국 민주주의가 한 단계 진전할 것인지 아니면 수십년 전으로 퇴행할 것인지 판가름난다고 보고 있다. 이들은 박 후보 당선을 민주주의 퇴행과 동일시한다.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 사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로 보인다. 하나는 형식적으로나마 유지되던 민주주의가 우리가 보는 그대로 이명박 정부 5년 동안 완전히 망가졌다는 사실이다. 여기에다 다시 유신독재자의 딸인 박 후보가 대통령이 된다는 건 민주주의를 다시 30년 전으로 되돌리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이들의 생각이 크게 틀린 것도 아니다. 박근혜 후보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면면을 보면 ‘과거가 아닌 미래’로 가자는 박 후보의 구호가 무색해진다. 박 후보 지지에 나선 김영삼 김종필 이회창 이인제 한광옥 한화갑 등등을 보고 있노라면 수십년 지난 흑백사진을 보는 느낌이다. 이런 흘러간 인물들을 영입해 ‘100% 대한민국’을 완성하려는지 모르지만 이들과 함께 미래로 나아가겠다는 것은 코미디다.
그렇다고 이번 대선을 이렇게 단순화된 도식에 비춰 분석하고 전망하기에는 다른 변수가 너무 많다. 나라밖에서야 엠비정권과 박 후보에 대한 거부감 때문에 야당의 병폐를 가볍게 보는지 모르지만 국내에서는 야권의 문제점을 피부로 느끼면서 살고 있다. 그러다 보니 이명박 대통령이나 박 후보에 대한 반감이 바로 야권 후보 지지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한마디로 정치권 전반에 대한 불신이다. 물론 자유당→공화당→민정당→민자당→신한국당→한나라당→새누리당으로 면면히 이어져온 보수 기득권 세력과, 이승만 독재정권과 5·16 쿠데타 이후 온갖 핍박을 받으며 민주주의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싸워왔던 야당 세력은 분명 ‘하늘과 땅만큼’이나 다르다. 그럼에도 젊은층과 서민에겐 그 차이가 크게 중요한 변수로 작용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정통 야당을 자처하면서도 각종 특권은 여당과 함께 누리고, 밑바닥 정치에서는 여전히 ‘오야붕과 꼬붕’의 구태정치가 판을 치는 현실이 눈앞의 판단 기준이 된다. 특히 이명박 정부를 들어서게 한 노무현 정부의 실패에 대해서는 아직도 응어리가 남아있다.
이런 틈새에서 새정치를 바라는 안철수 현상이 일어났음을 다시 한번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이는 그동안 기성 정치에 신물이 난 이들이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떠오르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떠밀린 듯한 안철수의 사퇴와 함께 이들도 어느 날 갑자기 거품처럼 사라져버렸다.
결국 이들을 다시 정치현장으로 불러내지 않고는 야권 승리는 어렵다. 아무리 박 후보를 유신독재의 후계자라고 몰아쳐도 마음 바꿀 국민은 별로 없다. 이미 국민 다수는 그런 구호에 좌우되지 않는 고정표로 굳어졌고, 적어도 이번 대선에선 새누리당 우세가 확인된 상태다.
이런 상황에서 민주당이 명심할 게 있다. 새로운 정치세력의 지지를 받으려면 안철수의 도움이 당연히 필요하겠지만 핵심은 안철수가 아니라 ‘안철수 현상’이라는 점이다. 앞으로 안철수만 적극 움직여주면 이길 수 있다는 생각은 착각이다. 등 돌린 안철수 지지층에게 일단 정권교체를 해놓고 봐야 새정치도 가능한 것 아니냐고 설득해봤자 별로 먹혀들 것 같지 않다.
민주당이 안철수 현상의 본질인 새정치를 얼마나 강력하게 실천하느냐에 따라 새로운 정치세력의 행보가 결정될 것이다. 그런데도 민주당은 정치쇄신은 제대로 않은 채 안철수 입만 보고 있으니 답답한 노릇이다.
정석구 논설위원실장twin86@hani.co.kr
[관련 영상] <한겨레캐스트 #3 -오피니언> ‘안철수 현상’의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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