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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2030 잠금해제] 빚과 그림자 / 최진영

등록 2012-08-12 19:17

최진영 소설가
최진영 소설가
친구가 다니는 직장에서 있었던 일이다. 입사한 지 2개월 된 수습사원이 건강이 좋지 않아 사흘간 결근했다. 그러자 사장은 그 사원의 월급에서 일주일치 임금을 뺐다. 주말에 쉬는 이유는 닷새 동안 일을 하기 때문인데, 닷새 중 사흘을 결근했으니 이틀치 급여도 줄 수 없다는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대면서. 입사 일년 미만의 직원에게는 단 하루의 연차도 주지 않겠다고 해서 사내 분위기가 좋지 않던 때였다. 직원들의 불만이 커지자 사장이 수습사원을 해고해버렸다. 일종의 본보기였던 셈이다.

해고 통지를 받은 날, 수습사원은 헤실헤실 웃으면서 중얼거렸다고 한다. 앞으로 120개월 동안 빚을 갚아야 한다고. 학자금 대출로 진 빚이었다. 그 말을 들은 친구는 말을 잇지 못하다가, 이제 어떻게 할 거냐고 겨우 물었다. 수습사원은 역시나 헤실헤실 웃으며, “다른 데 또 알아봐야죠, 뭐” 하고 대답했다. 화도 내지 않고, 울지도 않고, 세상이 원래 그런 것 아니냐고 되묻는 표정으로.

등록금을 부담하느라 70% 가까운 대졸자가 빚을 지고 있다. 이력서에 써넣을 토익 점수를 위해 매달 학원비와 응시료를 지출하는데, 기업은 토익 점수를 통해 그 사람의 영어 실력보다 성실성을 판단한다고 한다. 취업에 필요한 건 학점이나 토익 점수만이 아니다. 어학연수 경험과 인턴 경험과 각종 자격증도 필요하다. 대부분 돈이 없으면 쌓기 어려운 스펙이다. 각종 스펙을 쌓아 무한 경쟁을 뚫고 취업한 뒤 빚을 갚으려면, 아파도 안 되고 부당함에 항의해도 안 되고 노동법 따위 들먹여도 안 되고, 기계처럼 시키는 대로 일만 해야 한다. 사람을 기계처럼 부리면서도 사측에서는 성실성뿐만 아니라 창의성과 사회성도 함께 요구한다.

청년들이 현실을 표현하는 단어로 많이 꼽는 것이 ‘생존’ ‘불안’ ‘경쟁’이다. 삶의 중요가치로 행복한 가정이나 건강보다 ‘안정된 직장과 경제적 풍요’를 더 많이 꼽으며, 직업을 선택할 때 고려하는 것 역시 적성이 아니라 ‘안정성’이다. 우리나라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국 중 고용률과 고용안정률은 최하위인 반면, 가장 많이 공부하고 성적은 뛰어난 나라다. 노동시간은 평균보다 훨씬 길지만 평균 소득은 하위권이다. 삶의 질과 만족도가 낮을 수밖에 없고 자살률이 높을 수밖에 없다. 돈과 힘을 가진 자들이 탈법과 불법으로 덩치를 불리면 그림자도 같이 커지고 함께 나누어야 할 볕은 점점 줄어든다. 자투리 볕과 같은 ‘안정’을 찾기 위해 이제 막 성인이 된 청년들은 어떤 세대보다 열심히, 치열하게 살지만 하루하루는 위태롭고 빚은 점점 늘어간다.

최저임금이 얼마인지도 모르면서 서민의 행복 운운하는 여당 대선주자나, 취업하려면 눈부터 낮춰야 한다고 말하는 대통령이나, 구조적 모순은 외면한 채 개인에게만 그 책임을 떠넘기는 기성세대들은 청년들의 불안과 그들이 갈구하는 안정에 대해 단 한번이라도 진지하게 고민해봤을까. 10년 동안 빚을 갚아야 하는, 입사 두달 만에 실직자가 된 20대 중반 청년의 헤실헤실한 웃음에 대해 상상해본 적이 있을까. 노동법을 지키지 않는 고용주의 통장으로는 나날이 돈이 들어가고, 부당하게 해고된 수습사원의 통장에는 나날이 빚만 쌓여간다. 해고된 그녀에게 우리는 무슨 말을 해줄 수 있을까. 그래도 힘내서 열심히 살라는 말? 아프니까 청춘이라는 말? 꿈과 이상을 가지라는 말? 부지런히 돈을 벌어 국가경쟁력을 높이라는 말? 말은 힘이 없고, 힘없는 소시민에게 법은 너무 멀리 있다.

최진영/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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