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병삼 영산대 교수
[한겨레 창간 24돌 특집] 탈출! 피로사회
“세월과 늙음을 제거한 데서
피로는 불안을 부르고 끝내
죽음을 초래할 것이다”
“세월과 늙음을 제거한 데서
피로는 불안을 부르고 끝내
죽음을 초래할 것이다”
디지털 기기를 오래 쓰면 피로가 눈으로 몰린다. 눈은 머리의 핵심이다. 얼굴을 뜻하는 한자 면(面)과 머리를 뜻하는 수(首)자에 눈을 상형한 목(目)이 또렷하다. 눈은 마음의 창이면서, 바깥 사물이 들어오는 항구다. 안팎이 번다하게 오가니 눈이 피로할밖에. 더욱이 디지털 기기는 눈을 유인하는 특성을 갖췄다. 디지털 화면은 배우의 땀구멍조차 또렷이 비춘다. 선명한 화면, 현란한 색상은 눈에 피로를 더한다.
디지털은 속도이기도 하다. 디지털은 시간을 압축하는 기계다. 압축된 시간은 젊음으로 표상된다. 어림과 늙음은 다 젊음으로 수렴된다. 디지털이 화려하고 현란한 까닭이다. 당연히 외모가 중시되고, 브랜드가 중요해진다. 스쳐 보고 지나가버리므로 ‘순식간에’ 눈길을 잡아당기기 위해서다. 디지털 피로는 속도에서도 발생하는 것이다.
외모의 안, 곧 인격이나 사람됨은 디지털화되지 못하므로 제거된다(delete). 처리와 제거는 디지털의 또 한 특징이다. 묵은 것과 늙음을 바로 제거해야 젊음과 현재가 유지된다. 해는 뜨고 달은 지는데도 정오에 정지해 있기라니! 시간과 싸우기, 젊음에 멈추기가 디지털 피로감의 근원이다. 피로가 은총같이 어깨 위로, 눈가로 쏟아진다.
디지털에는 겉과 거죽만 존재하므로 화장은 성형으로 진화한다. 몸에 칼을 대기 시작한다. 얼굴로부터 가슴과 허리, 손톱발톱에 이르기까지. 디지털은 선동한다. ‘비만은 암보다 무섭다!’ 눈은 머리의 상징을 넘어 몸을 장악하기에 이른다. 단 눈의 주인은 이제 내가 아니다. 디지털 속에 선명하게 거처한다.
급기야 디지털은 몸속으로 들어온다. 눈과 거래하던 디지털이 얼굴을 디자인하고, 몸을 설계하더니 머리카락은 물론 손톱발톱조차 알록달록 물들인다. 브랜드라는 이름으로 가방과 옷가지, 구두며 넥타이를 지시한다. 삶을 지배한다. 내가 바깥에 지배를 당한다.
디지털 세상에서 늙음은 죄악이다. 본시 노(老)자는 지혜의 상징이었건만 정보와 지식의 세상에 지혜의 자리는 없다. 세월을 온축해야 닿는 노숙함과 노련함은 사라지고, 노망과 노욕, 노탐과 노추라는 단어들만 나뒹군다.
시간이 인간화될 때, ‘인문화’될 때 세월이 된다. 세월은 0과 1로 투명하게 깜빡이는 디지털의 시간과는 다르다. 세월은 아날로그다. 세월은 숙성과 발효를 특징으로 한다. 발효는 변모다. 서로 적대적이기조차 한 콩과 소금이 만나, 세월을 묵혀 된장으로 변모하듯 한다. 발효에는 고통이 따르지만, 피로는 없다.
‘학이시습지 불역열호’라, 배움(學) 곧 정보와 지식에 멈추면 눈과 어깨에 피로가 남지만 익힘(習)이라, 몸의 변화에까지 이르면 기쁨이 터져 나온다. 사람은 콩이다. 콩이 시간만 보내면 썩어서 똥이 되지만, 소금을 안고 세월을 보내면 된장이 된다. 속도는 피로를 부르고, 세월은 기쁨에 닿는다.
디지털 피로는 세월과 늙음을 제거한 데서 비롯한다. 피로는 불안을 부르고, 끝내 죽음을 초래할 것이다. 디지털은 늙음을 용납하지 않으므로, 이미 몸속에 들어온 디지털은 몸에게 자폭을 지시할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 자살의 디지털적 측면이다.
오래된 책, 해묵은 책, 고전을 느긋이 시간을 두고 반복하여 읽는 것도 디지털 피로를 해소하는 한 방편이 되리라. 실은 요즘 부쩍 대학 바깥에서 부는 인문학과 동양사상 바람도 디지털 피로에 반응한 사회현상인 듯하다.
배병삼 영산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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