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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김민형의 여담] 설명하기와 보여주기

등록 2023-12-27 18:30수정 2023-12-28 02:38

카미유 피사로의 ‘퐁투아즈-옛 수녀원’(1873, 왼쪽)과 폴 세잔의 ‘퐁투아즈의 외딴집’(1875). 같은 대상을 그렸지만, 사제 관계인 두 사람의 확연히 다른 화풍을 알 수 있다.
카미유 피사로의 ‘퐁투아즈-옛 수녀원’(1873, 왼쪽)과 폴 세잔의 ‘퐁투아즈의 외딴집’(1875). 같은 대상을 그렸지만, 사제 관계인 두 사람의 확연히 다른 화풍을 알 수 있다.

김민형 | 영국 에든버러 국제수리과학연구소장

 19세기 프랑스의 인상파 화가 카미유 피사로의 큰아들 뤼시앙이 피사로와 그의 수제자 폴 세잔 사이의 관계에 관해 쓴 글이 있다.

“세잔은 오베르에 살면서 아버지와 일하기 위해서 3㎞씩 걸어오곤 했습니다. 그들 사이에 이론적인 대화는 끊이지 않았고 두 사람은 팔레트 나이프를 함께 사서 작업을 같이하기도 했습니다. (…) 어느 날 아침 아버지는 들판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고 세잔은 풀밭에 앉아 아버지를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농부 하나가 지나가다가 아버지에게 다음같이 귀띔했습니다: ‘저기 앉은 당신의 일꾼은 별로 열심히 일하지 않는군요.’”

미술평론가 클라크(T.J. Clark)는 이 글에서 세잔의 배움 과정을 읽어낸다. 우선 두 사람의 창의성에 많은 말이 필요할 만큼 지적인 이해가 중요했다는 점을 강조한다. 특히 그 당시 두 사람의 아이디어 교환은 20세기 미술의 원동력이 되는 큰 조류를 일으키는 작업이었기에 회화의 본질, 인식의 의미, 세상을 이해하는 각종 방법론에 관한 풍부한 가설과 반론이 오갔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그런가 하면 윗글의 후반부는 회화의 근간에 말이 없다는 현실을 보여준다. 즉, 수많은 직관과 사고와 행위의 교묘한 조화 속에서 이루어지는 창작력의 성장에 대가의 작업을 유심히 살펴보며 조용히 배우는 시간이 필수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클라크는 농부의 오류 또한 지적한다. 세잔이 피사로를 관찰하는 것은 전혀 수동적이 아닌, 사실은 굉장한 집중력을 요구하는 피곤한 일이었다는 것이다. 능동적인 학습의 중요성이 부각되는 우리 시대에 그냥 보고 듣기만 하는 것 같은 시간의 다양한 잠재력을 시사하는 재미있는 대목이다.

이 이야기는 보편적인 교육론과 쉽게 연결된다. 평범한 교실 안에서도 설명과 시범의 적절한 배합은 끊임없는 심사숙고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어린아이가 행동과 사고의 기초를 배울 때도 이 복잡한 평형은 연속적으로 작용하고, 배움의 단계와 종류에 따라 변하기도 한다. 가령 걸음마에 자세한 설명이 필요한 경우는 거의 없다. 말을 배울 때 같으면 때로는 설명이 유용하지만 어른들을 그냥 보고 배우는 것이 대부분이다.(사실 언어 습득의 효율성을 그것만으로 기술할 수 없기에 일종의 ‘언어 본능’이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이 20세기 중반부터 전개된 촘스키 언어학의 기본 전제이다.) 그런데 어른이 돼서 외국어를 공부하면 별수 없이 질서 정연한 설명의 역할이 커진다.

내가 수십년 동안 대학에서 수학을 가르치는 동안 접한 학생들의 피드백도 설명과 시범의 접점에 관한 것이 상당수였다. 때로는 ‘문제 푸는 것을 보여 주기만 하고 어떻게 하는 것인지 설명을 안 한다’는 말도 있었고 ‘이론만 설명하고 예를 충분히 보여주지 않는다’는 불평도 있었다.

설명과 시범의 배합이 학생에 따라서도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 또 하나의 난점이다. 그것은 성격차이 때문일 수도 있고 자질의 영향도 있다. 몇년 전 피아노와 바이올린의 대가 두 사람과 동시에 음악교육을 의논한 일이 있다. 둘은 이 문제에 아주 상반된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 바이올리니스트는 자세한 설명과 체계적인 이해를 중시하는 반면 피아니스트는 ‘보여주는 교육’을 재차 강조했다. 나중에 다른 전문가에게 이에 관해서 물어본 즉, 그는 피아니스트가 한번 보여주기만 하면 금방 습득해 버리는 굉장한 자질의 소유자라는 관점에서 차이를 설명했다. 현대미술의 대부 같은 거장 세잔 역시 피사로에게 자질이 넘쳐나는 ‘이상적인 제자’에 가까웠을 것이다.

클라크는 뤼시앙의 글을 이성적인 이해와 능동적인 관찰력의 입장에서 간략하게 설명한다. 그러나 풀밭과 하늘과 햇빛이 섞이고 농부가 참여하는 야외 교정에서 일어난 학습 이야기는 그 자체가 몇마디로 묘사하기 어려운 그림과 유사하기도 하다. 그 때문에 이 에피소드는 거의 영적으로밖에 전해질 수 없는 무한한 요소들로 이루어진 배움의 길의 복잡다단한 구성을 암시하고 있다. 몇가지 방법론으로 교육이라 불리는 사람의 형성 과정을 포착할 수 없다는 당연한 진리가 두 화가의 만남 속에 녹여져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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