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영재 | 의정부지방법원 남양주지원 판사
전국민 분노 유발 영화라는 ‘서울의 봄’은 과연 나의 분노도 끌어냈다. 특히 몇가지 지점에서 울화가 터졌다. 하나는 공사 구분의 상실이다. 군사반란 자체가 사익을 위해 공적 자원인 병력을 사용한다는 점에서 공사 구분 없는 작태이긴 하다. 그러나 북한과 대치 중인 상황에서 전방 병력을 서울로 이동시키는 짓을 다른 이도 아닌 군인이 하다니. 다른 하나는 기만적인 자기합리화다. 군사반란의 주역, 하나회는 당시 군 엘리트 조직이었다. 유능한 그들은 압도적인 정보 수집력과 조직 장악력을 기반으로 군사반란에 성공한 뒤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축배를 든다. 영화에서는 그들의 사리사욕이 적나라하게 드러나지만 글쎄, 그들은 군사반란을 ‘군 엘리트들이 내린 구국의 결단’으로 기억하지 않았을까.
공적 기관의 공사 구분 상실과 기만적인 자기합리화는 비단 그때뿐만 아니라 어느 시대, 어느 기관에서나 형태를 달리하여 반복적으로 나타났다. 내가 속한 사법부도 예외가 아니었다. 판사 스스로 다른 판사의 재판에 개입하거나 재판을 국정협력의 증거라고 표현하거나 재판 일방당사자의 패소를 막기 위한 대책을 강구하는 등 사법독립과 재판의 공정성을 부정하는 행태를 보이고선 그것이 사법부라는 조직의 강화를 위해 불가피한 노력이었다고 강변한 ‘사법농단’이 전형적인 예다.
사법농단의 주요 원인으로는 ‘사법관료화’가, 사법관료화의 주요 원인으로는 고등법원 부장판사 선발제도를 중심으로 한 피라미드식 인사구조, 대법원장의 막강한 인사권, 상명하복 방식의 사법행정이 꼽혔다. 특히 고등법원 부장판사는 고등법원뿐만 아니라 지방법원의 법원장 직위도 독점하여 맡았는데, 그 때문에 지방법원 판사들이 고등법원 부장판사들에게 예속되고 판사 계급화가 발생한다는 지적을 받았다. 사법관료화는 사법농단 이후에 비로소 불거진 문제는 아니다. 오랜 기간 사법부의 고질적인 문제로 지적되다가 2011년 고등법원 부장판사 선발제도를 폐지하고 지방법원 판사들의 인사와 고등법원 판사들의 인사를 분리하여 피라미드식 인사구조를 허물고 판사 계급화와 사법관료화의 병폐를 타파하겠다는 사법개혁안이 범정부 차원에서 천명되었다.
사법농단 재발 방지 대책으로 기존에 추진되고 있던 ‘고등법원 부장판사 선발제도 폐지’ 및 ‘지방법원·고등법원 이원화’의 완성이 요구되었다. 이원화 정책의 일환으로 지방법원장은 지방법원 판사들이 맡고, 고등법원장은 고등법원 부장판사들이 맡게 되었다. 지방법원의 사정은 지방법원 재판실무를 오래 경험해온 판사들이 가장 잘 안다는 관점에서든 지방법원을 고등법원과 대등하게 만들어 1심 충실화를 꾀하고 지방법원 판사들의 자긍심을 높인다는 관점에서든, 지방법원 판사가 지방법원장을 맡는 제도는 이원화 정책의 핵심으로 받아들여졌다. 법원장 추천제는 이원화를 전제로 대법원장의 법원장 임명 재량을 통제하기 위해 법원장 임명 때 판사들의 의견을 반영하라는 제도다.
사법농단 이후 사법관료화 및 상명하복식 사법행정의 폐해가 어느 정도 사라진 것인지 이제는 사법의 가장 큰 문제로 ‘재판 지연’이 꼽힌다. 심각한 문제이고,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데 동의한다. 의문은 재판 지연 해결을 위해 법원장 추천제를 폐지하라는 주장이다. 지방법원 판사들은 사법행정에 적합한 판사 대신 나의 워라밸을 지켜줄 판사를 법원장으로 뽑고, 그 전략이 성공하여 지방법원 법원장들은 판사들을 쪼지 않으며, 쪼지 않으면 일하지 않는 지방법원 판사들 때문에 재판 지연이 심각해졌기 때문이란다. 지방법원 판사는 무능하여 법원장이 되었어도 장기미제 등 어려운 사안들은 처리하지 못할 것이라고도 한다. 따라서 재판 지연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능력 있는 고등법원 부장판사들을 고등법원의 법원장뿐만 아니라 지방법원의 법원장에도 임명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고등법원 부장판사 선발제도 폐지 및 이원화 정책이 절대 진리는 아니다. 사법관료화의 폐해가 심각하다는 문제의식 아래 2011년부터 10년 넘는 기간 동안 사법개혁안으로 추진되어 왔지만 이견은 당연히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를 뒤집기 위해 분명한 근거도 없이 재판 지연의 원인으로 이원화 및 법원장 추천제를 지목하며 이렇게까지 지방법원 판사들을 모욕하여야 하는지는 의문이다. 고등법원 부장판사가 되지 않은 수많은 지방법원 판사들도 유능하고 성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