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일 광주에서 열린 민형배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책 ‘탈당의 정치’ 북콘서트에서 최강욱 의원이 발언하고 있다. 유튜브 ‘나두잼티브이(TV)’ 갈무리
이우연 | 정치팀 기자
요즘 100년도 더 전에 태어난 한 사람에게 빠져 있다. 이름은 김명순, 1896년생이다. ‘해에게서 소년에게’를 쓴 최남선이 만든 잡지 ‘청춘’ 문예작품 현상 공모에서 3위로 입선해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등단한 여성 근대문학 작가, 에드거 앨런 포 작품을 최초로 번역해 소개하는 등 5개 언어에 능통한 번역가, ‘매일신보’에서 일했던 이 땅의 세번째 여성 기자. 이력만 보면 요즘 말로 ‘사기캐’(사기 캐릭터)다.
그러나 세상은 그런 김명순을 불편해했다. 이름에 들어간 ‘순’처럼 순한 여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김명순이 남성 유력자와 문인에게 당한 일들을 살펴보면 “비범하거나 선구적인 여성이 불행해진다는 편견”(하재영, ‘나는 결코 어머니가 없었다’)이 실제였음을 알게 된다. 문학평론가 김기진은 그녀의 작품을 읽지도 않고 쓴 외모 품평 글을 ‘평론’이랍시고 잡지 ‘신여성’에 게재했다. 소설 ‘감자’의 김동인은 ‘김연실전’이라는 소설을 쓰며 김명순을 ‘방탕한 여성상’으로 멋대로 그려낸다.
김명순이 타락한 신여성이라며 남성 권력이 행한 집단 린치 중에서도 으뜸은 어린이날을 창시한 소파 방정환의 행태다. 그는 ‘은파리’라는 필명으로 잡지 ‘별건곤’에 김명순이 “남편을 다섯이나 갈고도 처녀 행세를 한다”는 등의 얼토당토않은 글을 썼다. 사실과 다른 방정환의 공격은, 감히 결혼도 하지 않고 설치는 여성에 대한 못마땅함으로 읽힌다. 그가 인격을 가진 사람으로 존중하자던 ‘어린이’에 한때 어린 여자아이였던 나는 포함되지 않았던 걸까. 이 일화를 알게 된 순간, 씁쓸했다.
지난주 더불어민주당의 ‘정치는 모르겠고, 나는 잘 살고 싶어’ 따위의 문구를 내건 ‘청년 비하 펼침막’ 사태와 최강욱 전 의원의 “설치는 암컷” 발언을 보면서 느낀 감정도 비슷했다. 정치인들이 섬기겠다는 시민 안에 ‘청년 여성’인 나는 포함되지 않는 것일까. 이건 자격지심일 뿐일까.
논란 이후 취재하며 접한 정치인들의 반응은 이 의심을 확신으로 바꿨다. 한 지도부 의원은 논란이 된 펼침막 문구에 관해 묻자 “난 잘 모르겠지만, 요즘 애들은 그런 걸 좋아한다니까 별수 있나”라고 말했다. 이해하려 들지도, 공부하려 하지도 않으려는 태도였다.
‘설치는 암컷’은 김건희 여사를 지칭한 것이라는 반박이 나왔지만, 이 역시 공감되지 않았다. 선출되지 않은 권력인 김 여사가 공적 영역에서 활동하는데도, 투명한 관리가 이뤄지고 있지 않다는 비판에는 십분 공감한다. 하지만 ‘설치는 암컷’ 발언으로, 자라오면서 ‘여자가 설친다’는 시선에 위축돼온 평범한 여성들이 상처받는다는 사실을 왜 그들은 모를까. 아니, 이해하기 싫은 걸까.
청년 비하 논란 펼침막과 관련해 조정식 민주당 사무총장은 “기획 의도가 어떻다 하더라도 국민과 당원들이 보기 불편했다면 이는 명백한 잘못”이라고 사과했다. 하지만 ‘설치는 암컷’ 발언과 관련해선 발언이 나온 자리에서 함께 웃었던 김용민·민형배 의원은 사과하지 않았다. 사과할 생각이 없냐고 물어보니 “보수 언론이 만든 프레임에 말려들지 않기 위해 사과는 어렵다”고 한다. 비겁한 변명이다. 그 낄낄거림으로 모욕받았다고 느끼는 수많은 여성에게, 지금이라도 사과하길 바란다.
azar@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