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대통령제 100년 결정적 장면들_08
하나회 숙정에서 시작했지만 한국 정치사에서 군사쿠데타 가능성이 완전히 닫힌 건 1995년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이 군사반란 혐의로 법정에서 중형을 선고받으면서다. 이 판결은 한국 군부에 중요한 경종을 울렸다. 쿠데타에 성공하더라도 언젠가는 반드시 처벌받는다는 교훈을 남겼다. 1961년 5·16 이후 한국 정치를 지배했던 군부의 영향력이 배제되고, 대통령제가 군사독재의 그림자에서 빠져나오는 순간이었다.
하나회 해체와 쿠데타의 종언
신원식 국방부 장관 후보자(육사 37기)는 몇 년 전, 1979년 신군부의 12·12 쿠데타에 대해 “박정희 대통령이 돌아가신 공백기에 나라를 구해야겠다고 나왔다고 본다”고 말했다. “5·16은 위대한 혁명”이라고도 했다. 신 후보자는 논란이 일자 “쿠데타는 절대 있어서 안 되고 대한민국 현실에선 불가능하다”고 해명했지만, 야당은 “하나회의 부활”이라고 비판했다. 부활까지는 아니더라도 하나회 해체 뒤 30년이 흐른 시점에 이런 인식을 가진 인물을 국방부 장관에 기용한 건 놀라운 일이다. 1993년 하나회 해체로 한국 정치를 오랫동안 뒤덮었던 군사 쿠데타의 먹구름은 비로소 걷히기 시작했다.
김영삼 정부가 정식 출범한 지 11일만인 1993년 3월8일 아침, 김 대통령은 권영해 국방부장관을 청와대로 불렀다. 아침식사를 시작하자마자 김 대통령은 권 장관에게 육군참모총장과 기무사령관을 바꾸겠다고 말했다. 육참총장과 기무사령관은 군의 요직 중의 요직이었다. 문민정부를 표방한 새 정부가 출범했지만, 군 출신 대통령(노태우)이 그만둔 직후라 군 영향력은 여전히 막강하던 시절이었다. 권영해 국방부장관은 너무 놀라 밥을 제대로 먹지 못했다. 육사 출신의 군내 사조직 ‘하나회’ 숙청의 막은 이렇게 올랐다. 김영삼 대통령은 2001년 펴낸 회고록에서 당시 상황을 이렇게 묘사했다.
“ ‘권 장관, 내가 오늘 육군참모총장과 기무사령관을 바꾸려고 합니다. 누가 후임으로 적임자인지 한번 말해 보시오.’ 권 장관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듯 커다란 충격을 받은 표정으로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핵심 요직인 육참총장과 기무사령관은 지난 수십년간 군사정권의 지배세력이었던 군내 사조직 하나회 실력자들이 돌아가면서 맡아오고 있었다. 쑥국만 두어 숟가락 뜬 권영해 장관과 함께 나는 곧장 군의 인사기록 검토에 착수했다. 두 사람만의 극비 작업이었다. 오전 11시30분을 조금 넘긴 시각, 나는 김진영 육군참모총장과 서완수 기무사령관을 해임하고, 비하나회 출신인 김동진 연합사 부사령관을 육참총장으로, 김도윤 기무사 참모장을 기무사령관으로 새로 임명했다. 나는 권 장관을 재촉해 신임 육참총장과 기무사령관을 청와대로 불러 간단한 임명 절차를 밟았고, 두 사람에게 빨리 부대로 돌아가 취임식을 가지라고 했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한 조처였다.”
4시간 30분 만에 이뤄진 전격 인사였다. 권영해 장관이 그날 오후 국방부 기자들에게 설명한 내용도 비슷했다. 권 장관은 이틀 전에 대통령 업무보고가 있다는 연락을 받고, 8일 아침 일반 자료와 장군 명부를 들고서 청와대에 들어갔다. 그런데 갑작스레 육군참모총장과 기무사령관 교체를 통보받았다고 한다. 바로 그 자리에서 장군 명부를 펴놓고 후임자 인선을 했다. 김 대통령의 친필 메모를 갖고 국방부로 돌아온 권 장관은 실무 인사절차를 밟은 뒤 다시 대통령의 최종 재가를 받았고, 오전 11시20분쯤 김진영 육참총장에게 전역을 통보했다.
육해공 3군 본부가 모여 있는 충남 계룡대는 발칵 뒤집혔다. 김진영 총장 퇴임식과 김동진 새 총장 취임식은 그날 오후 곧바로 거행됐다. 1979년 12·12 때 수도경비사령부 33경비단장(대령)으로 실병력을 쿠데타에 동원했던 김진영 육참총장은 한순간에 날아갔다. 이어 4월2일엔 국방부에서 중장급 이상 장성들의 회의가 열리는 도중에 수도권 방위 핵심인 안병호 수방사령관과 김형선 특전사령관이 보직 해임됐다. 두 사람도 하나회의 핵심 멤버였다. 국방부는 별다른 배경설명 없이 “대통령의 통치권 행사 차원에서 이뤄진 일”이라고만 밝혔다. 육참총장·기무사령관에 이은 수방·특전사령관 경질은 군부의 힘을 빼고 쿠데타 가능성을 제거하기 위한 조처로 읽혔다.
김영삼 정부 출범 석 달 만에 7명의 대장을 포함해 18명의 장군이 옷을 벗었다. 하늘에서 갑자기 떨어진 별은 40개에 달했다. 하나회 회원 중 3성 장군 이상 전원과 소장급 일부가 군복을 벗었고, 소장 이하도 모두 한직으로 밀려났다. 수요가 많지 않은 별 계급장은 조그만 공방에서 백금으로 제작했다. 한꺼번에 너무 많은 장성 인사가 나니까 별 계급장이 모자랐다. 김 대통령은 “국방부 장관과 국방부 간부들이 갖고 있는 계급장을 빨리 갖고 오라”고 지시해 청와대 신고식 때 달아줬다고 회고록에 썼다. 하나회 숙정은 영관급까지 이어졌다.
군의 반발 우려는 없었을까. 집권당인 신한국당 고위 당직을 지낸 인사는 “그때는 정말 군부가 들고 일어나면 어쩌나 걱정을 많이 했다”고 말했다. “대선 전부터 군부가 김영삼 후보를 마뜩잖게 생각하며 한번 지켜보자는 분위기라는 얘기가 적지 않게 돌았다. 밑도 끝도 없는 쿠데타설이 흘러다녔다. 와이에스(YS·김영삼 대통령의 애칭)가 대선 후보 시절에 외신 기자회견을 한 적이 있다. 외신기자들이 ‘당선되면 군부를 어떻게 할 것이냐’고 물었다. 와이에스는 ‘두고 보자’고 딱 한 마디 했다. 이걸 사람들은 군부와 타협할 것으로 해석했다. 군부도 그렇게 생각했다. 나도 들은 얘기인데, 대선 무렵에 와이에스가 김진영 육참총장을 불러 ‘절대 동요하지 말라’고 안심시켰다고 한다. 김진영 총장은 와이에스와 동향(경남 거제) 출신인 데다 부산고를 나와, 민정계뿐 아니라 민주계에도 친한 사람이 적지 않았다. 와이에스는 마지막까지 속마음을 꾹 숨겼다. 그러고는 취임하자마자 전광석화처럼 군 지휘부를 교체했다. 군부는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군부의 분위기는 좋지 않았다. 군 통신망이 연결된 청와대 상황실엔 한밤중에 협박전화가 걸려오기도 했다. 청와대 경호실에 근무했던 인사는 “1995~96년 무렵이었다. 김 대통령이 청와대 바로 옆 경복궁에 주둔하던 수방사 30경비단을 해체하기로 했다. 30경비단은 1979년 12·12쿠데타의 핵심 동원병력이었다. 청와대 주변의 군 병력을 빼겠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군 장교가 청와대 상황실로 전화를 걸어와 ‘니들 배때기엔 총알이 안 박히냐’고 위협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고 말했다.
하나회 숙정에서 시작했지만, 한국 정치사에서 군사쿠데타 가능성이 완전히 닫힌 건 1995년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이 군사반란 혐의로 법정에서 중형을 선고받으면서다.
1979~80년 신군부의 쿠데타와 5·18민주화운동 유혈진압에 대해선 그 전에도 검찰 수사가 이뤄진 적이 있다. 1995년 7월, 5·18민주화운동과 관련한 고소·고발 사건을 수사했던 서울지검 공안1부는 전·노 두 전직 대통령을 포함한 피의자 58명 전원에게 ‘공소권 없음’ 결정을 내렸다. 검찰은 발표문에서 “정치적 변혁의 주도세력이 새로운 정권 창출에 성공하여 새로운 헌정 질서를 수립한 경우 법적 효력을 다투거나 법적 책임을 물을 수 없고 결국 사법심사가 불가능하다는 견해가 학계에서 유력하다. 따라서 형식판단 우선 법리에 따라 전원 공소권 없음 결정을 했다”고 밝혔다. 두고두고 입길에 오른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논리가 여기서 나왔다.
그러나 5·18특별법이 제정되면서 검찰 수사는 다시 시작됐고 전·노 두 전직 대통령은 구속됐다. 내란·반란죄로 1심에서 전두환은 사형, 노태우는 징역 22년6개월을 선고받았다. 항소심에선 각각 무기징역과 징역 17년으로 감형됐다. 이 판결은 한국 군부에 중요한 경종을 울렸다. 쿠데타에 성공하더라도 언젠가는 반드시 처벌받는다는 교훈을 남겼다. 1961년 5·16 이후 한국 정치를 지배했던 군부의 영향력이 배제되고, 대통령제가 군사독재의 그림자에서 빠져나오는 순간이었다.
하나회 숙정과 군사쿠데타 주역의 사법적 심판은 1997년 평화적 정권교체의 밑돌을 놓았다. 1997년 12월 대선에서 야당 후보 김대중은 반세기 만에 정권교체에 성공했다. 김대중은 노벨평화상을 받을 정도로 미국과 유럽에선 높은 평가를 받았지만 국내에선 ‘빨갱이’로 몰릴 만큼 보수 세력의 극심한 견제를 받았다. 김대중 정부에서 청와대 공보수석을 지낸 박선숙씨는 이렇게 말했다.
“디제이(DJ)가 재임 중 ‘좀 더 일찍 대통령이 됐더라면…’이라고 탄식한 적이 있다. 그랬다면 우리나라가 아이엠에프(IMF) 환란 같은 고통을 겪지 않았을 텐데라는 아쉬움의 표현이었다. 저는 ‘더 빨리 될 수는 없었을 겁니다’라고 말씀드렸다. 디제이가 일찍 대통령이 됐다면, 어쩌면 혼란을 피하기 어려웠을 거다. 김영삼 대통령의 하나회 해체는 군사 쿠데타를 방지해 디제이의 집권 가능성을 높였다. 그 점에서 김영삼 정부는 김대중 정부가 정권교체라는 큰 강을 건널 수 있는 징검다리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박찬수 I 대기자
한겨레신문사에서 워싱턴특파원과 편집국장, 논설실장을 지냈다. 청와대와 국회를 취재하며 ‘정치란 결국 권력 행사를 통해 사회를 바꾸는 것’이란 생각을 갖게 됐고, 그 점에서 어떻게 하면 권력을 제대로 올바르게 행사할 수 있을까에 관심이 많다. 청와대와 백악관의 작동 방식을 비교한 <청와대 vs 백악관>(2009년), 1986년 태동한 민족해방(NL) 사조를 다룬 <엔엘(NL) 현대사>(2017년), 한국 진보운동의 과제를 담은 <진보를 찾습니다>(2021년)를 펴냈다.
pcs@hani.co.kr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을 비롯한 12·12 군사반란과 5·18 유혈진압 주모자들이 1996년 12월16일 항소심 선고를 받기 위해 공판정에 서 있다. 이 재판은 ‘성공한 쿠데타도 언젠가는 반드시 처벌받는다’는 교훈을 남겼다. 한겨레 자료사진
12·12 쿠데타 다음날인 1979년 12월13일 아침, 신군부 쪽의 노태우 9사단장 휘하 병력이 경복궁을 삼엄하게 지키고 있다.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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