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대통령제 100년 결정적 장면들_06
‘디제이피(DJP) 연합’으로 집권에 성공한 김대중 대통령에겐 내각제 개헌이 마음의 짐으로 남았다. 박지원 당시 청와대 공보수석은 김종필 총리의 마음을 떠보기로 했다. 김 총리와 가까운 자민련 출입기자한테 부탁을 했다. 김 총리와 바둑을 두면서 내각제 개헌이 이뤄지지 않으면 어떻게 할 거냐고 넌지시 물어보게 했다. 김 총리는 손에 바둑돌을 만지작거리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대통령 중심제에서는 무슨 약속을 하더라도 현직 대통령이 안 한다고 하면 할 수가 없어요.” 이 얘기를 전해들은 김 대통령은 함박웃음을 지었다고 한다.
‘5년 단임 대통령제’와 내각제 논란 ①
1987년 7월24일 집권당인 민정당의 현경대 의원은 대통령 별장인 청남대에서 전두환 대통령을 만났다. 그해 6월 범국민적인 민주화운동으로 5공 군사정권은 대통령직선제 개헌을 받아들였다. 뒤이어 헌법 개정을 위한 여야 ‘8인 정치회의’가 막 가동을 시작한 무렵이었다. 현경대 의원은 ‘헌법개정 주요쟁점 검토’라는 제목의 문건을 전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그러나 최대 쟁점인 대통령 임기 문제는 보고문건에서 빠져 있었다. 현 의원은 “민정당에선 ‘6년 단임제’를 당론으로 제시했고, 통일민주당은 4년 중임제를 주장했다. 사실 민정당 내부에서도 4년 중임제를 주장하는 분들이 꽤 있었다. 하지만 단임제에 대한 전두환 대통령의 생각은 확고했다. 4년 중임제를 하면 대통령이 취임 직후부터 선거운동을 할 것이라면서 강하게 반대했다. 그러니 임기 문제를 굳이 보고할 필요가 없었다”고 말했다.
야당인 통일민주당의 당론은 1985년 개헌 현판식 이후 일관되게 ‘대통령 4년 중임제’(1차에 한해 중임이므로 사실상 연임제)였다. 두 야당 지도자 김영삼·김대중 모두 오랫동안 대통령 꿈을 꾼 정치인들이었다. 미국식의 4년 중임제가 대통령제에 가장 어울린다는 소신을 갖고 있었다.
노태우 민정당 대표의 직선제 수용 발표(6·29선언) 이후 시작된 여야 8인 정치회의는 대통령 임기 문제로 결렬 위기에 빠졌다. 민정당은 양보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현경대 의원은 “공식 석상에선 아니었지만 막후에선 와이에스(YS·김영삼의 애칭)와 디제이(DJ·김대중의 애칭) 양쪽에 이런 메시지를 던졌다. ‘4년 중임제를 하면 두 사람 중 먼저 대통령이 된 사람이 8년을 집권할 텐데 그러면 나머지 한 사람에겐 기회가 오지 않을 거다. 그러니 단임제로 가야 한다’는 얘기를 했다”고 말했다.
먼저 태도를 바꾼 건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였다. 김영삼 총재는 그해 8월12일 기자회견을 열어 “대통령 임기는 5년 단임으로 해도 무방하다”고 발표했다. 김대중 통일민주당 고문은 당황했지만 곧 ‘5년 단임제’를 받는 쪽으로 입장을 정리했다. ‘5년 단임 대통령제’는 이렇게 여야 사이에 역사적 합의를 이뤘다. ‘8인 회의’ 멤버였던 동교동계(김대중계)의 이용희 전 국회부의장은 생전에 <중앙일보>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때는) 장기집권을 막아야 한다는 게 최고의 목표였다. 5년 단임제가 탐탁지는 않았지만, 민주화를 뿌리내리려면 연임을 끊어야 했다. 또 5년 단임제는 한 사람이 연이어 할 수 없으니 (디제이나 와이에스 중) 한사람이 대통령을 하면 다른 한 명이 또 할 수 있었다.”
1인 장기집권을 막기 위한 더 유력한 방안은 내각제 개헌이었다. 하지만 국민은 내각제에 냉담했다. 1960년 4월혁명 직후 1년간의 내각제 시행이 무능과 불안정만 가져왔다는 생각이 강했다. 특히 7년 단임이던 전두환 대통령이 퇴임 이후 권력 유지를 위해 은밀하게 내각제 개헌을 추진했다는 점도 크게 작용했다. 전두환 정권은 야당에도 ‘권력 분점’을 미끼로 내각제 동참을 타진했고, 1986년 12월 제1야당인 신민당의 이민우 총재는 ‘내각제를 수용할 수 있다’는 뜻을 기자회견에서 밝혔다. 이 총재의 발언은 신민당이 깨지고 대통령직선제 개헌을 고수하는 통일민주당이 창당하는 도화선으로 작용했다. 국민 사이엔 내각제 개헌을 여야 간 ‘야합’으로 보는 시각이 굳어졌다.
와이에스와 디제이는 모두 내각제에 강한 불신을 갖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두 사람 모두 ‘내각제 개헌’을 김종필(JP)씨에게 약속했기에 역설적으로 대통령이 될 수 있었다. 첫 번째 내각제 각서 파동은 1990년 3당 합당 때 일어났다. 당시 노태우 대통령(민정당 총재)과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 김종필 신민주공화당 총재는 3당 합당을 하면서 ‘내각제 개헌’을 추진하기로 은밀히 약속했다. 김종필 총재는 ‘김종필 증언록’에서 이렇게 밝혔다.
“3당 합당의 마지막 공식 절차인 민자당 창당 전당대회(1990년 5월9일) 사흘 전이었다. 청구동 집으로 박준병 민정당 사무총장이 우리 당(신민주공화당) 김용환 정책위의장과 함께 찾아왔다. 그는 이른바 ‘내각제 합의각서’를 가져와 내 사인을 요청했다. 박 총장은 ‘조금 전 상도동에서 김영삼 총재를 만나 사인을 받아오는 길’이라고 설명했다. 나는 반갑게 서명을 하며 ‘수고했다. 그러나 내각제의 길이 순탄치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와이에스와 내가 차례로 서명한 문서는 그날 저녁 청와대로 다시 보내졌다. 그 후 노 대통령 친필 서명이 추가된 사본이 나한테 전달됐다.”
그러나 김영삼 민자당 대표는 내각제 개헌을 할 생각이 없었다. 전당대회 20일 뒤 언론에 내각제 합의서가 공개되자 와이에스는 “내각제 약속이 국민 위에 있을 수 없다. 만약 내각제 개헌을 하면 노 대통령은 과거 정권처럼 불행한 일을 당할 것”이라며 탈당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3당 합당이 깨질 위기에 놓이자 노 대통령은 내각제 추진을 포기하겠다고 발표했다. 제이피의 꿈인 내각제 개헌은 물거품이 됐다. 그 물거품을 뒤로하고 1992년 12월 대선에서 김영삼은 제12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두 번째 ‘내각제 합의’는 디제이와 제이피 사이에 만들어졌다. 1997년 대선을 앞두고 김대중 새정치국민회의 총재는 김종필 자민련 총재와 연대를 추진했다. 군사독재에 의해 덧씌워진 ‘과격하다’는 이미지를 탈피하고 중도·보수 유권자들에게 다가서기 위한 노력이었다. 지지율에서 큰 차이가 났지만, 디제이는 연대를 위해 모든 걸 양보할 생각이 있었다. 내각제 약속은 이런 차원에서 이뤄졌다. 김종필씨는 증언록에서 그 장면을 이렇게 묘사했다.
“1997년 10월25일 김용환·한광옥이 ‘대선 후보단일화 합의문’을 만들었다. 대통령후보는 김대중, 국무총리는 내가 맡기로 하고 내각제 개헌은 공동정부 2년째인 99년 12월 말까지 완료한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서명을 서둘지 않았다. 디제이를 직접 만나 들어야 할 얘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10월27일 밤 8시30분, 김대중 총재가 청구동 우리 집을 비밀리에 찾아왔다. 그는 거실 소파에 앉아 인사를 한 뒤 갑자기 바닥에 내려앉았다. ‘김 총재님, 이번 대선에서 저를 좀 도와주십시오.’ 나는 디제이를 소파에 앉도록 권하며 ‘도와드려야죠. 그런데 부탁드릴 게 있습니다. 첫째 대통령이 되시면 임기 중에 내각제 개헌을 꼭 해주십시오. 둘째 국민화합 차원에서 박정희 대통령 기념관을 하나 세워주십시오.’ 디제이는 둘 다 흔쾌히 약속했다.”
‘디제이피(DJP) 연합’으로 집권에 성공한 김대중 대통령에겐 내각제 개헌이 마음의 짐으로 남았다. 국무총리직을 비롯해 공직의 50%를 자민련에 양보했고, 박정희 대통령 기념관을 위한 예산 200억원도 책정했다. 그러나 1999년 12월까지 약속한 내각제 개헌은 도저히 추진할 수 없었다. 디제이피 연합이 깨지지 않을까 김 대통령은 걱정했다. 박지원 당시 청와대 공보수석은 제이피의 마음을 떠보기로 했다. 김종필 총리와 가까운 자민련 출입기자한테 부탁을 했다. 김 총리와 바둑을 두면서 내각제 개헌이 이뤄지지 않으면 어떻게 할 거냐고 넌지시 물어보게 했다. 김 총리는 손에 바둑돌을 만지작거리면서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대통령 중심제에서는 무슨 공약을 하고 무슨 약속을 하더라도 현직 대통령이 안한다고 하면 할 수가 없어요.”
제이피의 말을 전해들은 박지원 수석은 곧바로 김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김 대통령은 ‘김종필 총리야말로 최고의 정치인이다’라며 함박웃음을 지었다”고 박지원씨는 회고했다. 마음 한편을 짓누르고 있던 돌덩이가 떠내려가는 느낌이었으리라. 1999년 7월17일 김 대통령과 김 총리는 워커힐의 한 빌라에서 부부 동반 만찬을 했다. 이 자리에서 김 대통령은 정식으로 내각제 개헌 약속을 지킬 수 없다면서 양해를 구했다. 김 총리도 수긍했다. 어찌 보면 1997년 대선을 앞두고 ‘디제이피 연합’을 할 때부터 두 사람은 내각제 개헌이 쉽지 않다는 걸 예감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만큼 국민 마음속에 대통령제는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나 ‘5년 단임제’에 대한 비판과 개정 요구는 그 뒤로도 계속 분출했다.
※ 다음 회엔 ‘5년 단임제’의 문제점과 개선방향에 관한 이야기가 실립니다.
박찬수ㅣ대기자
한겨레신문사에서 워싱턴특파원과 편집국장, 논설실장을 지냈다. 청와대와 국회를 취재하며 ‘정치란 결국 권력 행사를 통해 사회를 바꾸는 것’이란 생각을 갖게 됐고, 그 점에서 어떻게 하면 권력을 제대로 올바르게 행사할 수 있을까에 관심이 많다. 청와대와 백악관의 작동 방식을 비교한 <청와대 vs 백악관>(2009년), 1986년 태동한 민족해방(NL) 사조를 다룬 <엔엘(NL) 현대사>(2017년), 한국 진보운동의 과제를 담은 <진보를 찾습니다>(2021년)를 펴냈다.
pcs@hani.co.kr
1997년 11월3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김대중 국민회의 총재와 김종필 자민련 총재가 ‘디제이피(DJP) 연합 합의문’에 서명한 뒤 악수를 하고 있다. 이 합의문엔 1999년 12월까지 내각제 개헌을 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한겨레 자료사진
1987년 6월29일 노태우 민정당 대표가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포함한 민주화 8개항을 발표하고 있다. 6·29 선언 직후 여야는 ‘8인 정치회의’를 가동해 5년 단임 대통령제에 합의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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