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 서초구 한 초등학교 교사의 49재인 지난 4일 교사들이 ‘공교육 멈춤의 날’ 집회에서 손팻말을 들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남지현 | 금융팀 기자
살다 보면 이래저래 억울한 일을 겪기 마련이다. 최근 내게도 그런 일이 있었다. 지면에 옮기기엔 지루한 개인적 일화지만, 이 사건을 통해 한가지 깨달은 게 있다. 대개 억울하다는 감정은 매우 주관적이라는 점이다.
누명을 쓰거나, 부당한 지탄을 받을 때만이 아니다. 좋은 의도로 한 행동이 오해를 사거나, 내 공로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할 때도 억울하다는 감정은 고개를 든다. 정당한 평가나 대우를 받지 못했다고 느낄 때, 그 부당함에 이는 분노가 곧 억울함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런데 이 ‘정당하다’거나 ‘부당하다’는 생각은 지극히 주관적인 판단에 불과하다. 나의 의도나 사정은 말 그대로 나의 사정일 뿐이어서, 상대방의 사정을 헤아리면 잘잘못의 경계는 흐려진다. 더군다나 우리는 누구나 자신을 선해하기 마련이어서 나의 잘못은 눈감고 상대방 잘못에는 민감하게 반응하곤 한다. 왜곡된 상황 인식이 억울함을 불러올 수 있는 것이다.
억울함이라는 감정은 기본적으로 편향적이다. 내가 오해받고 불리한 상황에서는 억울하다는 감정이 피어오르지만, 반대로 누군가 나를 실제보다 좋게 평가하고, 내게 유리한 상황이 벌어질 때면 억울하다는 감정은 온데간데없다. 억울하다는 감정은 자기 보존적인 방향으로만 작동한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타인의 억울함에 공감을 표하는 일에 신중하다. 공감보다는 검증이 앞선다. 누군가 억울한 얘기를 하면 앞뒤 사정을 들어보고 판단한다. 근거가 없거나 일목요연하지 않으면 아무리 목소리 높여도 공감을 얻는 데 실패하고 메아리 없는 공허한 외침으로 그치기 십상이다.
사적인 다툼이나 오해에서 비롯된 억울함이 아니라 사회적 편견과 구조적 차별이 빚어낸 억울함도 별반 다를 것이 없다. 노골적이지 않은 차별과 편견은 증거를 남기지 않는다. 다만 사회적 소수자가 느끼는 억울함에서만, 그리고 그 억울함의 모습이 아주 닮았다는 데서만 그 존재를 드러낼 뿐이다. 이런 억울함은 말해지지 않는다. 못 한다고 하는 게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관계는 상대적이라 우리는 어떤 면에서는 모두 사회적 약자가 된다. 말 못 할 억울함이 소수만의 일은 아니라는 얘기다. 최근엔 학부모 갑질에 못 이겨 서울 서초구 한 초등학교에 근무하던 2년차 교사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대전에서도 학부모의 악성 민원에 괴로워하던 교사가 세상을 등졌다. 동료 교사들은 국회 앞에 모여 “억울한 죽음이 반복되어선 안 된다”고 외쳤다.
세상을 떠난 교사들에게 악성 민원을 넣었던 학부모들의 신상이 온라인에 밝혀지고 이들에게 거센 비난이 쏟아지고 있다. 사적인 보복은 당장은 문제를 해결한 듯한 효능감을 줄 수는 있다. 그러나 숨진 서초구 초교 교사의 49재 추모제에서 동료 교사들이 쏟아냈던 비슷한 경험들에 비춰 볼 때 악성 민원이 개별 학부모만의 문제는 아니었을 것이다. 같은 억울함을 겪는 이들이 아직도 우리 곁에 있을 수 있다. 너무 늦게 알아 미안한 죄책감이 분노로 휘발되어서는 안 되는 이유다. 어떤 억울함은 사회적 공감과 연대를 통해서만 풀 수 있다. 억울한 죽음 앞에 우리는 어쩌면 이렇게 물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힘드셨겠다’는 말에 인색하지는 않았나? 그리고 우리는 이제 무엇을 해야 하는가.
southjh@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