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오피니언 칼럼

[말글살이] 부정문의 논리

등록 2023-08-24 18:47수정 2023-08-25 02:37

일본이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를 시작한 24일 오후 인천시 중구 인천종합어시장에서 시름에 쌓인 한 상인이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해양방류 개시 뉴스를 보고 있다. 연합뉴스
일본이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를 시작한 24일 오후 인천시 중구 인천종합어시장에서 시름에 쌓인 한 상인이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해양방류 개시 뉴스를 보고 있다. 연합뉴스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캬, 이 기발한 문장을 떠올리고 나서 얼마나 안도했을까. ‘오염수 방류의 계획상에 과학적 기술적 문제는 없는 것으로 판단했다. 다만, 우리 정부가 오염수 방류를 찬성 또는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 줄여서 ‘문제는 없지만, 찬성하는 건 아니다’ ‘문제가 없으니, 찬성한다’거나 ‘문제는 없지만, 반대한다’고 하지 않은 게 이 문장의 묘미.

부정문은 고차원적인 논리 게임이다. ‘ㄱ은 ㄴ이다’ 형식의 긍정문이 어떤 대상에 대한 적극적 판단과 해석을 표현한다면, ‘ㄱ은 ㄴ이 아니다’라는 부정문은 소극적이고 유보적인 태도를 표명한다. ‘~가 아니다’, ‘~이지 않다’, ‘~하지 않았다’라고 하면 그것 아닌 모든 가능성을 허용한다. 세상사가 이분법적으로 확연히 나뉘지 않으므로. ‘너를 싫어해’ 대신 ‘너를 좋아하진 않아’라고 하면, 빠져나갈 구멍이 생긴다. ‘너를 존경해’ 또는 ‘너를 사랑해’라는 ‘반전’을 꾀할 수도 있다. 상대방에게 해석의 여지를 많이 남길수록 나는 안전해지고 책임은 옅어진다.

당신도 이런 적이 있을 거다. “옷이 너무 마음에 들어. 하지만 사지 않을래.” 마음에 드는 옷을 보고 그 자리에서 사는 사람보다, 발길을 돌리는 사람이 더 많다. 돈이 없어서, 비슷한 옷이 있어서, 먼저 사야 할 게 있어서. 판단의 근거는 무한대.

잔머리를 굴려 ‘찬성하지 않는다’는 고급 표현을 썼지만, 그 판단의 근거가 ‘찬성한다’는 뜻으로 읽히기 충분한 ‘과학과 기술의 문제’를 들이댄 게 잘못이겠지. 차라리 ‘일본이 오염수 방류를 밀어붙이고 있고 우리는 그걸 막을 힘도 의지도 없지만, 그렇다고 찬성하는 것은 아니다.’ 이랬다면, 약소국의 설움을 함께 나누며 해양생태계의 궤멸을 ‘운명이겠거니’ 받아들였을지도 모른다. 말의 실패. 정치의 실패.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오피니언 많이 보는 기사

부끄러움을 가르치는 학원이 필요하다 1.

부끄러움을 가르치는 학원이 필요하다

‘-장이’와 ‘-쟁이’ [말글살이] 2.

‘-장이’와 ‘-쟁이’ [말글살이]

차기 정부 성공의 조건 [세상읽기] 3.

차기 정부 성공의 조건 [세상읽기]

분노한 2030 남성에게 필요한 것 [슬기로운 기자생활] 4.

분노한 2030 남성에게 필요한 것 [슬기로운 기자생활]

숨가쁜 세상, 심호흡을 권한다 [노정혜 칼럼] 5.

숨가쁜 세상, 심호흡을 권한다 [노정혜 칼럼]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