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병합 당시 한국인들을 차별하지 않고 일본인과 동등하게 대우하겠다고 약속했다. 마치 한국을 일본의 한 지방으로 편입하여 발전시켜줄 것처럼 말했다. 그러나 그것은 사탕발림에 불과했다. 한국을 일본의 한 지방으로 편입시키고, 한국인을 일본인과 동등하게 대우해주는 일은 결코 없었다. 이를 위해서는 한국인에게도 참정권을 주고, 의무교육도 실시하고, 군대에 갈 수 있도록 징병제도 실시해야 했다. 그러나 이는 일본의 중앙정치와 안보를 위협할 수 있고, 비용도 많이 들어 결코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1910년 한일병합조약이 강제 체결된 한국통감 관저. 남산에 있었는데 현재는 일본군 ‘위안부’ 기억의 터가 자리하고 있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박찬승 | 한양대 사학과 명예교수
며칠 뒤면 8월22일이다. 지금으로부터 113년 전, 1910년 8월22일 제3대 통감 데라우치 마사타케는 일기에 이렇게 썼다.
“오늘 오전 10시 궁내부 대신(민병석)과 시종원경(윤덕영)을 불러 협약의 부득이함과 향후 왕실의 대우에 대해 말해주었다. 두 사람은 이에 수긍하고 돌아갔다. 12시, 고쿠분 참여관으로부터 궁중에서의 일이 모두 제안한 대로 잘되고 있다는 보고가 있었다. (중략) 오후 4시 한국병합조약의 조인을 통감관저에서 마쳤다. 참석자는 이완용, 조중응, 부통감, 그리고 나였다. 또 오는 29일에 이를 발표하기로 결정하고 대의를 통지해두었다. 합병문제는 이와 같이 용이하게 조인을 마쳤다. 하하.”
데라우치의 입장에서는 생각보다 쉽게 한국병합 문제를 마무리할 수 있었으니, 득의양양하여 “하하” 소리가 절로 나왔을 것이다. 물론 ‘병합’은 쉬운 일은 아니었다. 데라우치는 이날을 위해 치밀하게 준비했다. 그는 먼저 위수령을 내려 정치집회를 금지했다. 지방에 있던 일본군 기병과 보병 일부를 서울로 불러들였다. 또 대한제국의 경찰권을 빼앗아 일본군 헌병의 지휘권 아래 두었다. 그러고는 통감부·창덕궁·덕수궁 등 서울의 주요 지점을 무장한 일본군 2600명이 경비하도록 하여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다. 이와 같은 군사적 강압의 분위기에서 이완용 등 한국의 내각과 궁중의 주요 인물들을 회유하고 협박하여 병합조약에 도장을 찍게 한 것이다. 이처럼 이는 강제적인 조약이었고, 게다가 한국 황제의 비준도 없었기 때문에 불법·무효라고 보는 것이 한국 학계의 일반적인 견해이다.
1910년 일본의 한국 ‘강제병합’은 오늘날까지도 한-일 관계를 규정하는 가장 중요한 상수이다. 일본 쪽은 당시가 제국주의 시대였고, 따라서 일본이 한국을 병합한 것은 시대적 상황에 따른 것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19세기 말~20세기 초 유럽 제국주의 열강들은 아시아나 아프리카에 식민지를 만들었지(그렇다고 이것이 잘한 일이라는 것은 아니다), 유럽 내에서 이웃 국가를 식민지로 만들지는 않았다. 영국이 아일랜드를 지배한 것이 비슷한 사례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영국은 16·17세기에 아일랜드를 정복하여 지배했고, 1801년 아일랜드를 아예 병합하여 한 나라로 만들어 지배했지 식민지로 만든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일본은 바로 이웃 나라, 그것도 임진왜란 이후에 통신사 등으로 비교적 평화롭게 교류해오던 나라인 한국을 병합하여 식민지로 만들었다. 따라서 한국인들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1893년 동학교도들은 전라감영에 제출한 소장에서 “임진년의 원수와 병자년의 치욕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라고 썼다. 이들은 300년 전 임진왜란의 치욕을 잊지 않고 있었다. 임진왜란은 불과 7년간의 전쟁이었지만, 일본의 한국에 대한 식민지배는 35년에 걸친 것이었다. 일본에 대한 한국인들의 좋지 않은 감정이 앞으로 얼마나 오래갈지는 가늠하기 어렵다. 따라서 한-일 관계에서 볼 때 1910년 일본의 한국 병합은 일본이 가장 잘못한 일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뿐만 아니다. 일본은 한국을 통치하면서 수많은 잘못을 저질렀다. 일본은 병합 당시 ‘일시동인’(一視同仁·모든 사람을 하나로 평등하게 보아 똑같이 사랑함)이라며 한국인들을 차별하지 않고 일본인과 동등하게 대우하겠다고 약속했다. 마치 한국을 일본의 한 지방으로 편입하여 발전시켜줄 것처럼 말했다. 그러나 그것은 사탕발림에 불과했다. 한국을 일본의 한 지방으로 편입시키고, 한국인을 일본인과 동등하게 대우해주는 일은 결코 없었다. 이를 위해서는 한국인에게도 참정권을 주고, 의무교육도 실시하고, 군대에 갈 수 있도록 징병제도 실시해야 했다. 그러나 이는 일본의 중앙정치와 안보를 위협할 수 있고, 비용도 많이 들어 결코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따라서 일본인들은 우선 한국을 식민지로 지배하면서 한국인들을 일본인들과 문화적으로 동화시키고, 일본 국민으로서 일본에 대한 충성심을 갖도록 만들고자 했다. 여기에서 나온 것이 ‘동화정책’이었다. 1910년대부터 학교에서는 일본어를 ‘국어’로, 일본 역사를 ‘국사’로 가르쳤다. 1930년대부터는 전국의 면 단위에까지 신사를 지어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또 ‘애국일’이라는 것을 만들어 일본에 대한 충성을 다짐하는 행사를 했다. 나아가 일본식으로 성씨와 이름을 바꾸는 ‘창씨개명’까지 하도록 했다. 신사참배나 창씨개명은 한국인들로 하여금 치욕과 분노를 느끼게 한 폭력적인 일들이었다.
한국인 아동들이 다니던 보통학교 5, 6학년에서 가르치던 ‘보통학교 국사’(1922·왼쪽)와 ‘초등국사’(1938·오른쪽)는 조선총독부에서 간행한 ‘일본사’ 교과서로, 한국사는 그 가운데 5~10% 정도 포함되어 있다. 박찬승 제공
같은 시기 영국, 프랑스, 미국, 네덜란드는 아시아의 식민지이던 인도, 베트남, 필리핀, 자바에서 그렇게까지 무리한 동화정책을 추진하지 않았다. 또 현지 주민들을 관료로 다수 채용하고, 식민지의회나 지방의회 같은 것을 만들 수 있도록 하는 등 어느 정도 행정과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했다. 그러나 일본은 한국과 대만에서 상·중급(칙임관·주임관)은 물론 하급(판임관) 관리, 심지어 군청 직원들까지도 다수를 일본인으로 채용하였고, 식민지의회 같은 것은 일절 허용하지 않았다. 한국과 대만에서 허용된 것은 1930년대의 매우 제한된 권리를 갖는 지방자치 의회뿐이었다.
서구 열강은 아시아의 원거리 식민지에 본국 인력을 보내기 어려워 현지 주민들을 교육해 식민통치에 활용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근거리 식민지인 한국과 대만에 본국 잉여인력을 대거 보내 관리·교사·경찰 등으로 만들어 직접 통치하였다. 이 때문에 한국인과 대만인의 불만은 높았고, 이를 누르기 위해 총독부는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를 극도로 통제하였다. 이런 점에서 일본의 지배 아래 있던 한국과 대만은 아시아의 다른 식민지들에 비해 훨씬 열악한 조건에 있었다.
일본의 한국에 대한 병합과 식민지배는 한국인들에게 잊을 수 없는 수난과 고통의 역사였다. 그런데도 일본인 상당수는(심지어 일부 한국인까지) 아직도 일본의 식민지 조선 지배를 긍정적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이는 역사의 진실을 회피하는 태도에서 나온 것이다. 미래의 한-일 관계가 진정한 우호관계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일본인이든 한국인이든 과거의 역사를 직시하고 성찰할 것이 있다면 성찰하는 자세를 갖는 것이 필요하다.
1925년 남산에 세워진 조선신궁으로 올라가는 계단의 모습. 서울역사박물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