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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슬기로운 기자생활] 다시 태어나도 재벌은 못 되니까

등록 2023-08-17 19:01수정 2023-08-18 02:08

일본 엔티브이(NTV) 드라마 ‘브러쉬 업 라이프’. 왓챠 제공
일본 엔티브이(NTV) 드라마 ‘브러쉬 업 라이프’. 왓챠 제공

이우연 | 정치팀 기자

최근 콘텐츠 업계에서 많이 언급된 열쇳말 중 하나를 꼽자면 ‘회귀물’이 아닐까 싶다. 주인공이 과거로 돌아가 자신의 삶을 바꾸는 회귀물은 본래 웹툰·웹소설 분야에서 빈번하게 등장했는데, 지난해부터 드라마에도 본격적으로 등장했다. 누명을 써 살해당한 재벌 총수 일가 비서는 그 집안 막내 손자로 다시 태어났고(‘재벌집 막내아들’), 차기 대선 주자의 비리를 조사하다가 죽은 검사도 다시 태어나 복수를 계획했다.(‘어게인 마이 라이프’)

많은 언론이 ‘인생 2회차’ 서사 유행의 원인을 청년들의 무기력과 좌절감에서 찾는다. 아무리 노력해도 삶을 바꾸기 어려워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다)을 외치는 엠제트(MZ) 세대의 인생 리셋 욕구가 회귀물 유행에 한몫했다는 것이다.

‘30대 엠제트’인 나는 이런 분석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평범한 청년이 잘나가던 재벌 총수 비서나 검사에게 자신을 투영할 거 같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지금의 나는 다시 태어나 봤자 나일 텐데, 얼마나 많은 걸 바꿀 수 있을까? 수능시험을 세번째 보더라도(나는 인생 1회차에서 재수했다) 서울대에 갈 자신은 없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의 2020년 웹소설 이용자 실태조사를 보면, 회귀물이 주를 이루는 ‘현대 판타지’ 장르를 가장 즐겨 보는 세대는 10대와 40대다. 앞서 ‘이생망’ 운운한 언론들의 해석대로라면, 회귀물은 ‘가진 게 많은 중년이 더 풍부하게 누리는 상상’이라는 해석도 가능할 테다.

이런저런 회귀물들에 영 끌리지 않던 내게도 최근 마음에 와닿는 회귀물이 생겼다. 올 초 일본 엔티브이(NTV)에서 방영된 드라마 ‘브러쉬 업 라이프’다. 지방 공무원인 33살 아사미는 단짝 친구들과 저녁을 먹고 집에 돌아가던 중 트럭에 치여 죽는다. 눈을 떠보니 사방이 하얗고, 안내데스크 직원은 다음 생이라며 ‘큰개미핥기’ 사진을 건넨다. 아사미가 망설이자 직원은 인생 2회차를 살아 덕을 많이 쌓으면 다른 인간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고 한다. 아사미는 인생 2회차를 선택한다.

아사미의 두번째 인생에 찾아온 변화는 너무나 소소하다. 학교 성적은 조금 올랐지만 결국 다니던 대학의 입학 성적이 조금 더 높은 학부를 진학하는 데 그친다. 그에게 주어진 미션이란 기껏 해봤자 친구 아버지의 불륜을 막는 정도다. 오죽했으면 세번째 인생에서 드라마 프로듀서가 된 아사미가 자신의 인생들을 토대로 한 드라마 기획안을 내자, 회의 참석자들은 이런 말을 한다. “불륜을 막는 것으론 약해요. 많은 사람의 목숨을 구한다던가요, 구세주가 되는 건 어때요?”

다른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 여러 차례 인생을 반복하는 아사미를 가장 아사미답게 만드는 건 친구·가족과 보내는 시시콜콜한 시간이다. 아사미의 1회차 인생에 등장한 공무원 후배는 같은 인생을 여덟번 살면서 “첫 인생이 만족스러웠다”는 이유로 계속 똑같은 직업과 취미, 친구를 선택했다. 어쩌면 지금 엠제트 세대의 욕구란 ‘몇번이라도 살아도 좋을 정도로, 지금 이 생을 조금 더 잘살고 싶은’ 마음에 가까운 것 아닐까. 국가가 그런 삶을 만들어줄 수 없다면, 적어도 그런 희망을 보여줄 수 없다면, 그냥 개미핥기로 태어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고, 어지러운 뉴스 헤드라인을 보며 생각한다.

aza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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