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기 대통령 비서실장이 18일 오후 서울 종로구 총리 서울공관에서 당정 관계자가 참석한 가운데 열린 고위당정협의회에서 중대 범죄자 신상 공개 확대 방안 등에 대해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세상읽기] 김혜정 | 한국성폭력상담소 소장
국민의힘과 정부, 대통령실이 ‘중대 범죄자 신상공개 확대’ 특별법을 신속 추진하겠다고 한다. 부산 돌려차기 사건, 또래 살인 사건 등이 정책 추진 이유로 언급됐다.
현행 신상공개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아동청소년성보호법에 규정된 특정 성폭력 범죄를 저질러 유죄가 확정될 경우 그 신상을 공개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수사 중인 피의자가 수사기관에서 ‘중대 범죄자’로 인정될 경우 언론 등에 신상을 공개하는 거다. 정부·여당은 재판 중인 피고인도 필요할 때 신상을 공개하도록 하겠단다.
관련 뉴스를 보며 씁쓸했다. 현재 시행 중인 두 신상공개 모두 피해자가 사건 신고부터 진술, 처벌 의사를 유지해야 가능하다. 그러나 현실에서 피해자는 번번이 좌절한다. 가해자와의 권력 차이, 피해자를 압박하는 자원, 시간, 금전, 기회의 빈곤, 피해자 의심-가해자 편들기라는 젠더불평등과 편견 때문이다. 국가의 역할은 이를 바로잡고 좀 더 촘촘하게 피해자 권리를 보장하며 폭력을 해소해가는 것이다. 현재 피의자 단계 신상공개도 여론의 관심이 클 때 이뤄지는데, 그 관심이란 게 복불복이다. 어떤 피해자는 여론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뛰어다니지만 쉽지 않다. 대개 관심을 끄는 사건은 극도로 폭력적이었거나, 사건 처리 과정이 부당하게 꼬이고 잘못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부산 돌려차기 사건도 수사기관이 놓친 성폭력 정황을 피해자와 조력자가 끈질기게 파고들었고, 2심 재판 중간 단계에 그 사실이 인정돼 선고 형량이 높아졌다. 이때 정부가 할 일은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일일 텐데, 우여곡절 끝에 주목받게 된 사건 가해자 신상공개에만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무엇보다 신상공개는 예방과 재발방지가 목적이다. 성폭력 예방과 재발방지를 위한 통계, 연구, 교육, 홍보, 치료, 제도 개선이 함께 가지 않으면, 범죄자만 유명해지고 사건은 가십이 된다. 피해자들이 편견과 싸우면서 사건을 헤쳐나가는 동안 국가는 무엇을 하겠다는 것인가. 끔찍한 강력사건이 벌어질 때마다 범죄자 얼굴로 언론을 뒤덮겠다는 것인가. 국가가 할 일은 시간과 예산과 인력을 들여 제대로 된 기반을 마련하는 것인데, 이에 관해서는 돌아보지 않고 갑자기 일부 가해자에게만 해당하는 조치를 가중하면 수사기관과 재판부는 피해자에게 더 혹독한 의심의 잣대를 드리운다.
더 씁쓸한 소식이 있다. 서울시 직장 성희롱·성폭력을 다루는 ‘위드유 센터’가 문을 닫는 것. 위드유 센터는 서울 30인 미만 사업장 성희롱 문제 해결을 위해 2018년 개소했다. 30인 미만 사업체는 전체 사업체의 97.8%를 차지하고, 전체 근로자의 52.8%가 일하고 있다. 서울시 직장 내 성평등 및 성희롱 실태조사(2018)에서 직장 내 성희롱 피해 경험자의 80.2%가 30인 미만 사업장 종사자였다.
직장 내 성희롱은 현행법·제도상 ‘범죄’가 아니다. 하지만 성희롱은 성폭력 문화와 문제의 저변에 깔려 있다. 이에 따라 고용, 노동에 대한 불법 행위 또는 차별 행위로서 직장 내 예방, 긴급조치, 대응, 피해자 보호 등 책무를 부여하고 정부가 이를 감시·견인하도록 돼 있다. 위드유 센터는 관련 자원이 부족한 서울의 30인 미만 사업장에서 교육, 컨설팅, 피해자 지원, 인식 개선 사업을 해왔다.
지난 1일 열린 위드유 센터 성과 발표회에서 서울시 팀장은 “직장 내 성희롱만으로는 사업자들이 참여하기 부담스러워하는 것 같다” “일·가정 양립 지원이나 갑질 대응 등을 포괄하는 사업으로 변경하는 것이 필요하다”며 센터 운영 중단 뜻을 밝혔다. 더 촘촘히 찾아가 돕고, 지원하고, 홍보하고, 교육하는 것이 인프라다. 서울시는 이를 더 증진하기는커녕 도리어 이제껏 구축해온 기반마저 무너뜨리려 하고 있다.
몇년을 버티다가 결국 퇴사한 20대 여성 ○○을 생각한다. 어느 정도 규모 있는 사업장인 줄 알고 입사했지만 5인 이하로 쪼개져 사업자등록이 된 가족회사였고, 성차별 발언과 성희롱, 모욕 주기를 일삼던 사람은 사실상 사용자였으나 서류상으로는 아니었다. ○○은 우울과 불면, 불안을 안고 결국 퇴사했다. 이런 무게를 개인이 모두 감당하지 않도록 정부도, 정치도, 제도도 존재하는 것 아닌가? 가해자들 얼굴만 공중에 뿌리는 신상공개 확대가 아니라, 현실에 와닿는 성폭력·성희롱 대응 정책과 실행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