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우주정거장에서 본 도시의 아름다운 밤은 실제로는 빛공해다. 미국 항공우주국 제공
김한민 | 작가·시셰퍼드 활동가
“저녁이 있는 삶”이란 문구가 매력적으로 다가왔던 이유는 우리에게 쉼이 절실했기 때문이다. 2012년에 이를 대선 경선 슬로건으로 내걸었던 후보는 졌지만, 지금도 이 말은 회자된다. 동시에 우리는 11년이 지난 오늘도 여전히 저녁 없는 삶을 산다. 만약 저녁이 생긴다면, 무엇을 할 것인가? 아마 거창한 시간 활용 계획을 세웠다가 결국 어떤 종류의 화면 시청으로 귀결될 가능성이 크다. 저녁다운 저녁을 보낸 기억이 희미하지만, 어쩌면 저녁에 가장 ‘걸맞은’ 활동은 딱히 뭘 하지 않고 멍하니, 여유롭게 보내는 게 아닐까 싶다. 수면장애를 겪어본 사람이라면 저녁부터 몸이 잘 채비를 갖추도록 준비하라는 권고를 들어봤을 것이다. 어둠이 시작되는 자기 전 서너 시간 전부터 밝은 빛(특히 청색광)을 피하는 것도 그 준비에 해당한다. 하지만 요즘은 취침 직전까지 화면을 보고도 숙면을 취하는 사람이 상당수 있는 듯하다. 인류는 더 이상 어둠이 필요하지 않은 동물로 ‘진화’해가는 걸까? 그런가 하면, 한편에선 적응을 못 하는 동물들도 많다. 스웨덴의 박쥐 전문가 요한 에클뢰프의 책 <어두움 매니페스토>(The Darkness Manifesto)는 빛공해로 인해 인간·동식물이 받는 악영향을 자세히 기록한다. 어스름 달빛에 의존해 길을 찾는 나방, 쇠똥구리, 거미, 철새 등 수많은 동물은 강한 인공 빛에 방향감각이 교란돼 길을 잃거나 섭식에 곤란을 겪는다. 특히 곤충들은 이른바 “진공청소기 효과”(강한 인공 빛에 자석처럼 끌리는 현상) 때문에 밤새 조명 주위를 혼돈 상태로 서성이다 지쳐 죽어버린다. 이 원리를 이용한 기계(‘해충퇴치기’라지만 사실상 무차별적인 살상기계다)까지 등장해 곤충 섬멸에 가세하고 있다. 또 배추좀나방은 빛공해로 호르몬 교란이 일어나 교미에 실패하는 종 중 하나이고, 모래사장에서 부화해 나온 바다거북 새끼들은 해변에 늘어선 환한 조명들을 바다로 착각해 뭍으로 향하다 죽는다. 식물계에도 빛공해로 수분(受粉·꽃가루받이)에 지장을 받거나 싹이 너무 일찍 트는 종이 많다.
거의 모든 식물은 일정량의 어둠이 반드시 필요하며, 동물종의 절반 이상은 야행성이다. 만약 생태계에서 가장 막강한 영향력을 끼치는 동물인 인간이 야행성이었다면 상황이 달라졌겠지만, 인간은 주행성이라 밤을 두려워하고 경계해 최대한 없애려는 본능을 발휘해 왔다. 그 결과, 지구 역사상 오늘날처럼 밤이 밝은 적은 없었다. 이렇게 ‘연장된 낮’ 덕택에 우리는 더 오래 일하거나, 더 오래 놀 수 있게 되었다. “토요일 밤의 열기”는 “불타는 금요일”로 앞당겨진 지 오래고, 웬만한 도시의 휘황찬란한 밤은 목요일, 아니 주초부터 번쩍인다. 이처럼 밤이 줄고 밝아질수록, 어둠이 생존에 절실히 필요한 생명들은 고통받는다. 이들이 빛공해를 못 견뎌 하나둘 사라진다면, 그것은 밤을 ‘죽인’ 우리 책임이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은 곤충의 운명에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것이며, 그들이 생태계, 나아가 인간 식량생산 체계에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점도 모를 것이다.
사실 현대인은 어둠뿐만 아니라 햇살도 기피한다. 특히 한국인은 직사광선의 위험에 관한 교육을 너무도 잘 받은 나머지 잠깐의 햇빛도 못 견딘다. 그래도 일광욕의 가치를 아는 사람이라면 선글라스와 모자를 잠시 벗고 햇볕을 쬐면 그만이다. 즉, 개인 선택의 문제다. 그러나 어둠은 그렇지 않다. 주위가 모두 밝으면, 혼자서 아무리 암막커튼을 쳐봐야 한계가 있다. 우리나라는 이미 싱가포르, 홍콩과 더불어 세계에서 빛공해가 가장 심한 국가 중 하나다. 우리 삶에 어둠이 필수적이란 사실을 인정한다면 어둠의 문제는 공동체가 함께 풀어야 한다. 그리고 그 ‘우리’는 비인간 동식물을 포함하는 광의의 우리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