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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하루의 기울기

등록 2023-05-25 18:31수정 2023-05-26 02:36

서울 신도림역에 내린 시민들이 출근길을 재촉하며 서둘러 지하철 출구로 빠져나가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서울 신도림역에 내린 시민들이 출근길을 재촉하며 서둘러 지하철 출구로 빠져나가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사사로운 사전] 원도 | 작가·경찰관

오늘 출근길 지하철도 역시나 만원이다. 사방으로 어깨가 꽉 끼는 게, 헬스장에서 어깨 운동을 열심히 한 덕은 분명 아니었다. 서있기만 해도 눈물이 고일 것 같은 지하철 안 인구밀도. 그 사이 좌석에 앉은 채 목적지로 가는 사람들이 단연 눈에 띤다.

좌로 한발짝. 우로 두발짝. 지하철이 흔들릴 때마다 바람에 여지없이 나부끼는 갈대처럼 이리저리 흔들리는 사람들. 딱 짊어진 가방 무게만큼 기울어진 어깨. 이들 모두 기울어진 것일 뿐, 삐뚤어진 것이 아니다.

퇴근길 지하철에서 웬일로 앉아가는 날이면 여지없이 졸다가 내릴 역을 지나치곤 했다. 잠에서 전혀 벗어나지 못해 무거운 머리를 들고 지나쳐 온 만큼의 시간을 지불해 돌아가야만 한다는 셈을 마칠 때면 삐뚤어진 마음이 자라나기 일쑤. 왜 이렇게까지 일상을 살아야만 하는 거지. 정년퇴직 때까지 이 생활을 반복할 자신은 어디에도 없는데. 퇴직 뒤에도 일거리를 찾아야만 하는 현대사회가 밉기만 하다고. 불평불만을 고구마 줄기처럼 줄줄이 엮어내는 데는 나만한 선수가 없었다.

한껏 삐뚤어진 마음의 무게까지 이고 지며 일렬로 늘어선 계단을 힘겹게 오르내린다. 걷기에도 힘든 기울기건만, 그 위를 많은 사람들이 전속력으로 뛰어가고 있었다. 스크린도어 앞에서 휴대폰을 바라보는 그들의 고개는 모두 기울어진 상태. 세상은 태어날 때부터 기울어진 채였다고, 평생 기우뚱하게 살아왔으니 평지를 걷는 감각을 우리 모두 잃어버린 게 아니냐고, 삐뚤어진 마음으로 삐뚤게 써내려가는 몇줄의 문장.

엄청난 기울기를 자랑하는 경사로 옆으로 다닥다닥 붙은 다세대주택들. 한번 골목을 잘못 들어서면 빠져나오기도 쉽지 않았던 곳. 양쪽 창문을 모두 열고 고개를 이리저리 빼가며 후진하던 기억. 성능이 좋지 않은 경찰 차량은 언덕에서 후진기어를 넣고 엑셀을 밟아도 자꾸만 앞으로 갔다. 확실히 후진을 하기 위해선 있는 힘껏 엑셀을 밟는 수밖에. 경사로에서의 중립기어는 곧 전진이고, 확실한 후진만이 후진이다.

이 길이 옳은 길이 아님을 알면서도 제대로 후진하지 못했던 건, 삶에서 마주한 선택의 길 역시 평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기울어진 가계 사정. 영을 지나쳐 마이너스로 기울어진 통장잔고. 꺾인 나이. 그런 상황들이 만들어낸 선택지로 나도 모르게 굴러가던 나날들. 진정 원하는 길로 돌아가려면 눈을 질끈 감고 온 힘을 다해 발을 구르는 방법 뿐.

상체를 기울이고 연필을 잡는다. 잠들기 전 연필을 깎아두는 게 하루 일과의 마지막인 만큼, 어제 깎아둔 연필은 무척 날카롭다. 날이 잔뜩 선 연필을 적당히 기울인 채, 더 이상 기우뚱하게 살고 싶지는 않다는 다짐을 삐뚤삐뚤 적어 내려간다.

젊은 여자가 스스로 생을 마감한 현장에서 발견된 유서. 몇장에 걸쳐 작성된 유서에는 자신을 이런 상황까지 몰아세운 사람을 죽어서도 끝까지 저주한다는 내용과, 자신의 마지막을 처리해야 하는 분들이 부디 아무런 트라우마도 받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란다며 이런 모습을 보여드려 죄송하다는 내용이 함께 담겨 있었다.

반듯한 글씨로 써내려간 마지막 편지는 삐뚤어진 마음의 고백일까, 기울어져버린 상황에 대한 분노일까. 당사자의 상황은 전혀 알 수 없는 상태로 단서 하나만 주워들은 나는 이럴 때마다 참 무기력해지고, 만화 <명탐정 코난>처럼 모든 진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 어디서든 갑자기 툭 나타나 숨겨진 진실을 일목요연하게 설명해주길 바랐다.

내일 출근도 여전히 기울어진 몸뚱이로 해야 하고, 퇴근도 마찬가지다. 그래도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이만하면 꽤 괜찮게 자리를 잡은 것 아니냐고 위안하는 스스로가 싫다. 편지는 답장을 주고 받으며 쌓여야만 하고 진실은 부디 사는 내내 밝혀져 권선징악이 이루어지면 좋겠다. 내일 출근길은 자신 없지만 퇴근길만은 부디, 기울어진 고개를 들고 지하철 창밖에 흐르는 한강을 바라보길 삐뚤지 않게 다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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