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백악관의 세심한 의전과 배려가 한국 대통령실에서 자랑할 일인가? 외교 상대국으로부터 지극한 환대를 받는다고 무작정 희희낙락할 일인가? 그 환대가 국민에게 이익으로 돌아오나? 국가안보실 도청 의혹을 앞장서서 무마하고, 우크라이나와 대만 문제에 관해서도 호쾌한 돌격대장처럼 미국 입맛에 착 맞게 나서주니 미국이 환대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지난 4월27일 미국 워싱턴디시의 의사당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상·하원 합동연설을 하는 동안 참석자들이 기립 박수를 보내고 있다. 워싱턴/연합뉴스
이진순 | 재단법인 와글 이사장
그가 돌아왔다. 이번엔 한치의 ‘쪽팔림’도 없이 보무도 당당하게 개선장군처럼 귀환했다. 방미 기간 중 조 바이든 대통령과 다섯차례나 대면 만남을 가지며 ‘극진한 환대’를 받았다는 미담은 백악관 만찬장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아메리칸 파이’를 열창하자 200여명 내빈들이 환호성과 함께 기립 박수를 보냈다는 대목에서 ‘감동’의 정점을 찍는다. 귀국 직후 대통령실은 “미국으로부터 역대 최고의 국빈 만찬이라는 평가를 받았다”며 이번 방미 성과를 열거한 보도자료를 냈다.
지난가을의 해외순방과 비교하면 달라진 건 사실이다. 지난해 9월 이번과 똑같이 5박7일 일정으로 영국, 미국, 캐나다를 순방했을 때는 첫날부터 영국 여왕 빈소에 조문하지 못한 채 헛걸음했고, 미국 방문 때는 조 바이든 대통령과 48초간 서서 대화를 나누는 데 그쳐 ‘48초 회담’이란 역대 유례없는 외교기록을 남겼다. 설상가상으로 ‘바이든/날리면’ 비속어 파문까지 터져 얻은 것 없이 만신창이가 된 해외순방이었다. 그에 비해 이번에는 바이든 대통령이 “나의 친구”라고 불러주고 윤 대통령 취향을 사전에 파악해 야구 기념품과 제로콜라까지 준비해 줬으니 대우가 달라졌다고 느낄 법도 하다.
그런데 미국 백악관의 세심한 의전과 배려가 한국 대통령실에서 자랑할 일인가? 외교적 무능으로 대통령이 국제적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는 건 국민에게도 치욕이지만, 외교 상대국으로부터 지극한 환대를 받는다고 무작정 희희낙락할 일인가? 그 환대가 국민에게 이익으로 돌아오나? 국가안보실이 미국 중앙정보국에 도청당했다는 의혹을 앞장서서 무마하고, 신중하고 정교한 외교전략이 필요한 우크라이나와 대만 문제에 관해서도 호쾌한 돌격대장처럼 미국 입맛에 착 맞게 나서주니 미국이 환대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 대가로 얻어온 ‘워싱턴선언’은 실체가 모호하고, 인플레이션감축법(IRA), 반도체법 등에서 한국 기업을 가로막는 장벽을 어떻게 낮출지도 구체적으로 협의가 이뤄진 게 없다. 말로 주고 되로도 못 받아온 셈이다. 시도 때도 없이 어퍼컷을 휘날리듯 써 갈긴 대통령의 해외 백지어음이 어떻게 돌아올지 걱정이다.
또 하나 염려스러운 건 이번 미국 순방을 통해서 윤 대통령이 자신의 정치철학과 노선에 한층 확고한 자부심을 품게 되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다. 대통령 취임식에서부터 보여준, 자유의 전사로 자신을 자리매김하는 전략은 이번 미국 방문에서도 두드러진다. 미국 의회 연설에선 자유를 46번 외쳤고 불과 19분 남짓한 하버드대 연설에선 자유가 82번이나 등장한다. 대통령실에선 “자유민주주의, 법치, 인권 등을 수호하는 ‘가치동맹’으로서의 역할을 재확인했다”고 주장하지만 미국 건국의 핵심 가치인 자유가 그가 말한 자유와 같은 것이라고 보긴 어렵다.
미국 의회 연설과 하버드대 연설에서 윤 대통령은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협하고 부정하면서도 마치 자신들이 민주주의 운동가, 인권운동가인 양 정체를 숨기고 위장하는” “전체주의 세력”에 맞서 “힘을 합쳐 용감하게 싸워야 한다”고 자신의 지론을 재천명했다. 환호와 기립 박수에 취한 대통령이 혹여 이것을 자신의 통치관에 대한 국제적 인정과 지지라고 과신할까 걱정이다. ‘법에 의한 통치’를 ‘검찰에 의한 국가통제’로 여기는 대통령에게 루소가 말한 법치란 ‘특권층의 권력횡포를 차단하기 위한 제도’란 경구가 통할 수 있을까? 존 스튜어트 밀은 <자유론>에서 사상과 양심의 자유, 취향과 추구의 자유, 개개인이 연합할 수 있는 결사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으면 “정부의 형태가 어떻든 절대 자유로운 사회가 아니”라고 했다.
대통령이 미국 의회에서 자유를 외치던 지난 27일, ‘산재사망 대책 마련 공동캠페인단’은 윤석열 대통령을 ‘2023 최악의 살인기업 특별상’ 수상자로 발표했다. “중대재해처벌법을 무력화하고 과로사를 조장하는 노동시간 개악을 추진하여 노동자 건강권에 악영향을 주었”다는 게 선정 사유였다. 김건희 여사와 앤절리나 졸리가 닮은꼴 패션으로 플래시 세례를 받는 동안에도 일상이 전쟁터인 이들의 생존투쟁은 피를 말린다. 그들에게 자유란 생존할 권리, 생존을 위해 발언할 권리, 투쟁할 권리이다. 비슷한 옷을 걸쳤다고 이쁜이가 갑분이가 되는 게 아니듯 자유를 외친다고 누구나 자유의 수호신이 되는 건 아니다. 오늘도 어디에선가 평균 3명이 산업재해로 목숨을 잃을 것이다. 이윤이 최고 덕목인 사회에서 소모품처럼 죽어갈 운명인 이들에게 자유는 생명이다. 그 요구를 불온하다고 내친다면 자유를 외칠 자격이 없다.
지난 4월27일 오전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 앞에서 열린 ‘2023 최악의 살인기업 선정식’에서 참석자들이 윤석열 대통령에게 특별상을 수여하는 행위극을 하고 있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