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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봄, 비상의 계절

등록 2023-04-20 19:01수정 2023-04-21 02:04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원도 | 사사로운 사전

비상(飛上)이다. 까만 얼굴에 하얀 꼬리를 가진 새가 날아오른다.

추락(墜落)이다. 사람이 건물 옥상에서 투신했단다.

발돋움하고 허공을 나는 건 매한가지건만. 비상과 추락은 무엇을 기준으로 구분하는 걸까. 적어도, 누군가 추락한 현장의 상황은 말 그대로 비상(非常) 상황이긴 했는데.

두 발로 땅을 딛고 선 상태로도 추락할 수 있는 거냐고, 아무나 붙잡은 채 묻고 싶어졌다. 뛰어내리는 것만이 추락이라 할 순 없는 노릇일 텐데. 오르는 행위를 추락이라 부르면 안 되는 걸까? 얼마 전 계단 모서리에 부딪힌 정강이에 샛노란 멍이 들었다. 입에 풀칠하고 사느라 봄이 오는 것도 몰랐는데, 신체에 핀 노란 꽃을 보고서야 날씨와 계절을, 시간의 흐름을 깨닫는다.

두꺼운 외투를 세탁소에 맡길 때가 돌아왔지만 곧장 맡기진 못한다. 세탁소가 할인하는 요일에 맞춰야 하기 때문이다. 예전엔 한 번 부딪혀도 멍드는 일은 도통 없었는데 요즘은 스치기만 해도 툭툭, 혈관이 터진다. 나이가 들수록 의연해질 줄 알았더니 되레 상처만 잘 입는다. 역사 깊은 유물을 조심히 다뤄야 하는 것처럼, 꽤 묵은 인간에게도 같은 자비를 베풀어주었으면. 나이 드니 별것이 다 서럽다고, 엄마는 자주 말씀하셨다.

머리를 감은 뒤 허리를 펴다가 종종 수도꼭지에 뒤통수를 찍히곤 했다. 오늘도 어김없이 그런 날이었다. 젖은 머리를 쓰다듬다, 각기 다른 방향으로 분출됐던 추락 현장을 떠올렸다. 스위치를 켠 것처럼 나도 모르게 작동하는 생각의 회로. 그만, 이런 거 상기하고 싶지 않아. 전원을 끄고 싶어도 방법을 알 수 없는 일련의 과정. 이 전원을 끄는 방법은 추락밖에 없다는 현실을 부정하고 싶은 마음. 추락이 아니라 비상이라 생각하자고 다짐해본다. 비상, 비상이다. 젖은 게 비단 머리만은 아닐 것 같다.

추락(墜落). 높은 곳에서 떨어짐.

추락(秋落). 풍작으로 가을에 쌀값이 폭락함.

역설적이다. 수확량의 비상으로 도리어 추락하는 상황이라니. 비상과 추락은 반의어가 아니라 동의어인지도 모르겠다.

날이 풀리고 얼어붙었던 한강도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다가, 자기들끼리 부딪혔다가를 반복하며 끝없이 흐른다. 경사가 없어 추락하지도 못하는 저 한강에 얼마나 많은 눈물과 인생이 섞여 있을까. 스스로 추락할 수 없는 한강에 부서지는 햇살처럼 추락하는 사람들과 숱한 인생. 다시 비상하기엔 물을 잔뜩 머금어 너무도 무거워진 기억. 페달을 마저 굴리지 못하고 수습하는 현장을 조용히 지켜보는 자전거 탄 시민들. 한강변엔 가림막이 없다. 땡볕에도 시선에도 그대로 노출될 수밖에.

혹시나 신원이 확인되지 않을까 자신의 휴대전화와 신분증을 방수팩에 넣고서 투신한 젊은이를 보내주고 왔던 날도 비상이었다. 아직 깨지지 않고 붙어있는지 확신이 없어 자꾸만 뒤통수를 긁었고 방에서 물비린내가 나는 것 같아 향을 피워올렸지만 향냄새 때문에 외려 방 전체가 커다란 안치실이 된 것만 같았다. 침대로 추락한 몸은 잔뜩 늘어져 좀처럼 일어나기 힘들던 밤.

비상이다. 일상을 버티는 게 이토록 힘겨워진 세상이라니. 매일 아침 출근하기 위해 내려가는 지하철 통로가 꼭 추락하는 과정 같다. 그렇다고 통로를 빠져나오며 계단을 오르는 행위가 비상처럼 느껴지진 않는다. 건널목에서 담뱃불을 붙이는 남자를 목격한 아침. 기본적인 예의까지 추락해버린 세상에서 스스로를 지키는 게 퍽 어려운 과제가 됐다.

드라마 <더 글로리>에는 “봄에 죽자”는 대사가 나온다. 한강으로 투신하려는 주인공을 말리기 위한 대사였고 훗날 ‘봄에 죽자는 곧 봄에 피자는 뜻’이라는 해석이 나오지만, 막상 봄이 오는 한강을 보며 그 대사를 떠올리니 울적해진다. 사계절에서 봄이 영영 사라져도 좋을 것만 같다. 꽃이 피지 않겠지만 대신 추락할 일은 없을, 삼계절의 세상으로 비상하고만 싶다.

작가·경찰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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