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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홍대입구역 8번 출구

등록 2023-03-16 18:32수정 2023-03-17 02:35

서울 홍대 거리의 모습. 연합뉴스
서울 홍대 거리의 모습. 연합뉴스

[사사로운 사전] 원도 | 작가·경찰관

토요일 저녁을 홍대에서 보낼 생각을 하다니. 체력에 제법 자신이 있는 모양이구나, 아직도 서울의 밀도를 그렇게 모르냐는 룸메이트의 타박을 들으며 외출길을 나섰다. 2호선은 끔찍할 정도로 사람이 많았다. 낫지 않은 장염으로 고통받는 배를 움켜잡고 사람들 틈을 비집은 뒤 겨우 곧추섰다. 옴짝달싹할 틈도 없어 두손을 차렷 자세로 두고 있어야만 했다. 문이 열렸다 닫히길 반복하면서 인구밀도는 더욱 높아져만 갔을 뿐, 출구는 보이지 않았다.

급체로 인한 토기가 올라와 봉천역에서 급히 내렸다. 화장실을 가려면 층을 올라가야만 했다. 열몇개 계단이 지옥문을 지키는 수장처럼 보였다. 혓바닥 밑에 구렁이가 숨어든 것처럼 꿈틀거리는 속을 겨우 붙잡고 들어간 화장실. 세면대 앞에 서있던 할머니는 내가 속을 모두 비워내는 동안 휴대폰을 붙잡고 욕설이 반쯤 섞인 고성을 내질렀다. 할머니 입으로 나온 욕설은 출구를 찾지 못하고 화장실 내부를 빙빙 도는 것만 같았다. 돈 80만원에 관한 일화로 20분간 고성방가를 내지르는 할머니에게도 사정은 있을 것이다. 목적지에 도달하기도 전에 봉천역에서 하차해야만 했던 나의 속사정처럼.

토요일 오후 홍대입구역은 역시나 사람이 많았다. 8번 출구로 나가고 싶었지만 출구로 들어오는 사람이 더 많아 병목 현상이 일었다. 처음 보는 서울교통공사 직원이 지친 표정으로 경광봉을 흔들었지만 경광봉의 기울기에 맞춰 걸음을 떼는 사람은 없었다.

출구 바깥으로 나오자 전단지를 나눠주는 할머니가 계셨다. 앞의 경광봉처럼, 할머니의 전단지에 맞춰 걸음을 떼는 사람도 없었다. ‘출구’는 밖으로 나갈 수 있는 통로, 혹은 빠져나갈 길을 뜻하는 말이건만. 밖으로 나가거나 들어오는 통로 앞에서 나가지도, 들어오지도 못한 채 할머니는 전단지를 모두 돌려야만 했을 것이다.

예수를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갈 거라는 무시무시한 말을 마이크 위로 뱉는 사람들에게서 멀어지고 싶었지만 8번 출구 앞에 몰린 인파 때문에 쉽지 않았다. 거리의 사람들은 인종이 다양했으나 전도는 한국어로만 진행됐다. 모국어로부터의 출구가 묘연했다.

함께 온 친구는 속이 안 좋은데 정말 외식을 해도 괜찮겠냐고 재차 물었다. 직장인에게 주말이라는 출구를 이렇게 망칠 순 없으니 강한 척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껏 찾아간 식당에서 몇점 제대로 먹지도 못했지만, 집으로 다시 돌아갔다고 한들 기력이 샘솟았을 것 같지도 않았으니 그럭저럭 괜찮은 외출이었던 셈이다.

서울에서 화장실을 보유한 상가를 찾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화장실이 어디 있냐고 물으니 직원은 익숙한 손짓으로 출구를 가리킨다. 나가셔서 오른쪽이에요. 열쇠 가지고 가세요. 그러고 보니 오늘 밖에서 화장실만 몇번을 가는 거지. 몸속 통로도 활짝 열려버린 게 분명해. 민망한 표정을 지으며 후다닥 볼일을 끝내고 돌아왔다. 돌아온 곳에 여전히 나의 자리가 있다는 사실은 사람으로 하여금 커다란 안도감을 준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출구로 향하는 일이 두렵지 않게 된다.

우리는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다시 홍대입구역 8번 출구로 향했다. 흔히 출구라 부르는 곳은 정작 출입구라는 명칭이 적혀 있었다. 호기롭게 나갔던 곳으로 다시 돌아와야만 하는 구조. 이 야속한 순환이 어디 지하철에만 있으랴. 세상일이라고 다르지 않다. 마음으로 품은 사람은 마음으로 나가고, 마음으로 품은 고통은 적당한 출구를 찾지 못해 배회하다가 많은 인파와 함께하고서야 기어코 빠져나간다. 이규리 시인의 <많은 물> 구절처럼, ‘결국 젖게 하는 사람은/ 한때 비를 가려주었던 사람이다’.

홍대입구역 8번 출구에서 만난 친구와는 건대입구역 4번 출구에서 헤어졌다. 실제 명칭은 출입구인 출구 안으로 들어간 뒤 개찰구 너머로 멀어지는 친구에게 인사를 건넸다. 친구는 손을 붕붕 흔들며 멀어진다. 왔던 곳으로 다시 나간다. 돌아간 곳에 나의 친구는 없을 것이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 출구는 퍽 두려운 존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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