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오피니언 칼럼

존재가 불법인 사람은 없다…영국의 ‘난민추방’ 법안에 부쳐

등록 2023-03-14 18:20수정 2023-03-15 02:38

지난 7일(현지시각) 리시 수낵 영국 총리가 런던 다우닝가에서 불법이민방지법 추진에 관해 설명하고 있다. 런던/AFP 연합뉴스
지난 7일(현지시각) 리시 수낵 영국 총리가 런던 다우닝가에서 불법이민방지법 추진에 관해 설명하고 있다. 런던/AFP 연합뉴스

[세상읽기] 장영욱 | 대외경제정책연구원 부연구위원

지난 주말, 영국 <비비시>(BBC)의 간판 축구 프로그램 ‘오늘의 경기’(Match of the Day)를 둘러싼 소동이 있었다. 24년간 프로그램을 이끌어온 ‘영국 축구의 전설’ 게리 리네커가 방송에서 배제됐기 때문이다. 7일 영국 정부가 불법이민방지법안을 발표한 직후, 리네커는 트위터에 이 법이 “가장 취약한 자들에게 헤아릴 수 없이 잔인한 정책”이라고 적었다. 비비시는 리네커가 자사의 불편부당 규정을 위반했다며 방송 출연을 정지시켰다. 이 조처에 반발해 동료 해설자들까지 출연을 거부하는 바람에,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 프로그램은 결국 건조한 경기 장면만으로 채워진 채 단축 방영될 수밖에 없었다.

영국의 불법이민방지법안은 그만큼 논쟁적이다. 이 법은 불법적인 경로로 영국에 들어온 이민자를 ‘가능한 한 빨리’ 추방하도록 규정한다. 이민자를 보낸 국가가 안전하다고 판단하면 즉시 본국으로 송환하고, 그렇지 않으면 제3국으로 이주시킨다. 이들은 영국에서 난민 지위를 신청할 수 없으며, 한번 추방당하면 영국 입국이 영구히 금지된다.

이 법안의 주요 대상은 소형 보트를 타고 영불해협을 건너는 이민자들이다. 이렇게 넘어온 사람이 지지난해에 2만9천명, 지난해에 4만6천명이었다. 고무보트에 의지해 바다를 건너는 동안 죽고 다치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이민자들이 국경을 넘기 위해 지불하는 돈은 밀입국 알선조직의 주수입원이며, 이민자 일부는 마약 밀수 등 범죄에 동원되기도 한다. 이민자들이 난민인정 절차를 밟는 동안 정부는 세금으로 거처를 마련해줘야 한다. 하루 숙박비만 620만파운드(약 100억원)에 달한다고 하니, 정부로선 골치가 아플 만도 하다.

그러나 불법이민방지법안이 이 문제를 풀 최선의 해법인지는 불분명하다. 고무보트에 몸을 실어 영국에 입국한 이민자 상당수는 까다로운 심사를 통과해 난민 지위를 인정받는다. 본국에서 정치적, 경제적 불안에 노출됐었다는 사실을 영국 정부로부터 공인받는다는 얘기다. 본국 상황이 해소되지 않는 한 이민자는 계속 밀려들어 올 것이고, 오히려 이 법으로 인해 이민자들이 공식 보호절차를 거치는 대신 지하로 숨어들어 범죄의 표적이 될 가능성이 커진다.

영국이 거부한 이민자를 기꺼이 받아줄 나라가 있을지도 의문이다. 지난해 4월 르완다와 난민이송 협정을 맺었다지만 1년이 지난 지금까지 법적 판단이 내려지지 않아 실행이 불투명하다. 유럽대륙 국가들 역시 같은 문제를 겪고 있어 이민자를 받기 어렵다. 난민 문제 해결을 위한 국제적 노력에서 의무를 분담하긴커녕 혼자만 쏙 빠지는 모양새라 주변 국가들의 시선도 곱지 않다. 당장 유엔난민기구가 불법이민방지법안을 두고 “분명한 국제난민협약 위반”이라고 지적했다. 법안을 설계한 영국 내무부 장관조차 이 법안이 유럽인권조약에 합치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고 자백했다.

혹, 법이 제 목적을 달성해도 문제다. 영국은 유럽연합 탈퇴 이후 이주노동자 감소로 인해 임금상승 압박을 심하게 받고 있다. 이민자 유입은 단기적으로 노동력 부족을 해소하고 장기적으로 경제성장 잠재력과 재정수입을 증대시키는 효과적인 대안 중 하나다. “가장 취약한 자들에게 헤아릴 수 없이 잔인한 정책”을 발표함으로써 영국은 스스로 그 대안을 포기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더 나은 ‘불법이민’의 해결책은 이주민들이 택할 수 있는 더 안전한 경로를 마련하고, 들어온 이민자들이 수용국 사회와 경제에 더 잘 스며들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보트 이민자가 영국이 필요로 하는 인력이 되기까지 추가적인 자원이 투입돼야 하는 것도 사실이지만, 언어 교육, 일자리 매칭 등 이미 효과가 입증된 정착 프로그램을 활용하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다. 물론 주요 송출국의 정치 안정과 경제 발전을 도와 원치 않는 이주 자체를 줄이는 방안도 병행해야 한다.

법이 허용하지 않는 경로로 국경을 넘었다고 이민자의 존재가 불법이 될 수는 없다. 더 안전하고 풍요로운 곳을 찾아 거처를 옮기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다. 그 본능을 불법으로 만드는 현실을 바꿔야지, 사람한테 불법 딱지를 붙여 손쉽게 돌려보내는 게 능사가 아니다. 마침 리네커가 2주 만에 ‘오늘의 경기’ 프로그램 해설자로 복귀한다는 소식이 들린다. 이민자를 향한 포용과 연대도 속히 제자리를 찾기 바란다.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오피니언 많이 보는 기사

‘윤석열의 계엄 폭동’ 내란죄인 3가지 이유 1.

‘윤석열의 계엄 폭동’ 내란죄인 3가지 이유

이성 잃은 비상계엄, 국민에 대한 반역이다 [사설] 2.

이성 잃은 비상계엄, 국민에 대한 반역이다 [사설]

형법상 내란죄 현행범들 즉시 체포·구속해야 [왜냐면] 3.

형법상 내란죄 현행범들 즉시 체포·구속해야 [왜냐면]

‘계엄령 선포·국회 난입’ 관련자 모두 내란죄 수사해야 [사설] 4.

‘계엄령 선포·국회 난입’ 관련자 모두 내란죄 수사해야 [사설]

대한민국 안보 최대 리스크는 ‘윤석열’이다 5.

대한민국 안보 최대 리스크는 ‘윤석열’이다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