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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로버트 파우저, 사회의 언어] ‘원어민주의’ 시대 막을 내리면서

등록 2023-01-18 20:24수정 2023-01-19 02:35

초등학생들이 원어민 교사로부터 영어 지도를 받고 있는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초등학생들이 원어민 교사로부터 영어 지도를 받고 있는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로버트 파우저 | 언어학자

미국 수도 워싱턴D.C. 교외에 미 외교교육원(FSI)이 있다. 1947년 설립된 이 기관 업무 가운데 하나는 외국어교육과 평가다. 미국인이 외국어에 별 관심이 없다는 건 잘 알려졌지만, 외교관은 사정이 다르다. 법적으로도 일정 수준 이상의 외국어 실력은 갖춰야 하고, 근무 중에도 외국어 실력 평가를 자주 받는다. 이는 업무평가는 물론 승진, 급여 등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1958년부터 외교관의 외국어 실력 평가가 의무화되며 외교교육원은 오늘날 약 70여개 언어를 가르치고 100여개 언어 평가를 하고 있다. 민간에서 거의 가르치지 않는 언어의 학습 교재를 개발하고 이를 사회에 공개해 일반인 외국어교육에도 크게 공헌하고 있다.

무엇보다 영어 원어민들이 ‘전문적인 수준의 구사 능력’을 갖추기까지 시간을 계산해 외국어마다 난이도를 통계화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에 따르면 영어 원어민이 한국어를 익숙하게 구사하기까지는 약 2200시간이, 스페인어는 약 600시간이 필요하다. 스페인어보다 거의 네배 가까이 많은 시간이 드는 한국어는 영어 원어민에게 그만큼 어려운 언어 중 하나인 셈이다.

외교교육원은 미 국무부 산하 기관이지만,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내 외국어교육에도 영향을 미쳤다. 1950년대 이후 개발한 외국어 실력 평가기준은 다른 연방정부 부처들은 물론 국제적인 기업들에서도 도입했다. 일찌감치 개발한 말하기 평가 인터뷰는 1980년대 미국외국어교육협의회(ACTFL)의 말하기 평가 인터뷰 개발에도 영향을 미쳤다.

평가기준을 조금씩 그리고 꾸준히 보완해온 외교교육원은 2010년대에는 디지털혁명이라는 시대적 특성을 반영해 평가기준을 전면 개정하기도 했다. 뒤이어 오랜 검토 과정을 거쳐 2022년 상반기에 부분 도입한 새로운 평가기준을 올해 전면적으로 확대할 예정이라고 한다.

1950년대 이후부터 외국어 평가기준은 말하기, 듣기, 읽기, 쓰기 전반을 평가해, ‘사용할 수 없다’(0단계)부터 ‘교육받은 원어민과 동일한 수준’(5단계)까지 단계별로 평가가 이뤄졌다. 대부분 외교관은 ‘전문적인 수준으로 구사할 수 있는’(3단계) 수준 도달을 목표로 삼았고, 일반적으로 ‘외국어에 유창한 이들’은 4단계, ‘원어민에 가까운 수준’이면 4+단계로 보았다.

그런데 2022년부터 새롭게 적용한 기준에는 흥미로운 변화가 보인다. ‘교육받은 원어민과 동일한 수준’인 5단계와 ‘원어민에 가까운 수준’인 4+단계를 ‘4단계’로 통합하면서 ‘원어민’이라는 말을 없애고, ‘고급 능력’이라고 이름 붙였다. 외국어 학습에서 ‘원어민 같은’ 실력을 갖춰야 한다는 목표를 삭제한 것이다. 이는 2000년대 이후 외국어교육에서 ‘원어민’을 바라보는 시선의 변화를 반영한 것이다.

1980년대부터 외국어교육은 개인이 전달하려는 의사의 소통을 목적으로 하는 의사소통 중심 교수법을 도입되면서 원어민에 관한 인식이 바뀌기 시작했다. 정확성을 중시하던 기존 인식이 약화하면서 정확한 발음과 표현을 위해 소환되던 ‘원어민처럼’ 같은, 원어민의 모델 역할이 약해졌다. 대신 세계적으로 이민과 인적 교류가 많아지면서 말보다 서로 다른 문화에 대한 상호 이해와 적응 능력이 중요해졌다. 이제 어디에 살더라도 그 언어권의 ‘원어민처럼’ 말하기보다 다양한 비원어민들과 함께 그 지역 언어를 사용하는 경우가 늘어났고, 얼마나 원어민처럼 정확하게 말하느냐보다 그 문화를 이해하는 능력이 중요해졌다.

새 평가기준을 설명하는 미국외교관협회(AFSA) 웹사이트에는 “원어민의 정의가 각각 다르고 원어민의 언어능력 범위가 넓다”고 밝히고 있다. 즉, 원어민 사이에도 언어능력이 서로 다르고, 원어민의 정의 자체도 어렵기 때문에 평가의 객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삭제한 셈이다.

그렇다고 해서 원어민 모델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언어는 곧 체계이기에, 체계에 맞지 않으면 의미 전달은 불가능하다. 발음과 문법이 어느 정도는 정확해야 말이 통한다. 발음, 문법, 표현 등에서 원어민을 모델로 삼아야 하는 것은 외국어 학습자라면 알고 있다. 하지만, 외교교육원의 새 기준이 의미하듯, 원어민과 똑같은 언어 구사력은 더는 외국어 학습의 최종 목표가 아니다. 이로써 오랫동안 지속한 ‘원어민주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원어민을 참조하되 각자 필요한 만큼까지가 외국어 학습의 최종 목표인 시대가 열리고 있다. 아니 이미 열렸다고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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