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스 디킨스 소설 <두 도시 이야기> 속 삽화로, 프랑스 혁명 당시 성난 군중의 모습을 담았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김민형 | 영국 에든버러 국제수리과학연구소장
‘그때는 최고의 시간이자 최악의 시간, 지혜의 시대이자 어리석음의 시대였다.’
찰스 디킨스의 소설 <두 도시 이야기>의 첫 문장 시작 부분이다. (원문이 굉장히 길기 때문에 우리말 번역은 보통 문장을 몇 개로 끊는다.) 프랑스 혁명을 배경으로 전개되는 역사극을 그야말로 극적으로 여는 이 문장은 영어 소설 문구 중 가장 자주 인용되면서 가장 잘못 인용되는 문장이기도 하다. 많은 독자가 이것을 시대에 대한 디킨스 자신의 의견으로 해석해서다. 오류를 파악하려면 같은 문장의 끝부분만 읽으면 된다: ‘즉, 그 시절은 현재와 너무 비슷해서, 당대의 가장 요란한 권위자들은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극단적인 표현만으로 시대상을 이해하고자 했다.’ 작가는 격한 표현을 좋아하는 사회평론가들을 풍자하는 문구로 소설을 시작한 것이다. 그러면서 혁명 이후 60~70년이 지난 자기 시대에도 그때와 비슷하게 극적인 말을 선호하는 사람들이 난무한다고 설명한다. 우리 시대에는 누구나 지구 전역의 시끄러운 뉴스를 종일 쉽게 접할 수 있어 많은 사람이 먼 곳의 비극을 의식하면서 살아간다. 그런 뉴스는 또 걱정과 근심의 근원이어서 ‘말세’에 대한 한탄을 하루에 몇 번 들을 때도 있다.
현대 문명에 대한 비관론을 많은 데이터를 근거로 비판하는 미국 심리학자 스티븐 핑커의 책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2011)는 세계적으로 많은 담론의 대상이 됐다. 그는 수천 년에 걸쳐 인간 삶과 사회가 점점 평화로워졌다고 주장한다. 가령 유럽의 중세에서 현대까지 작은 봉건 제국들이 중앙집권제 국가로 재편성되면서 살인율이 1/10에서 1/50까지 줄었단다. 구체적으로 13세기 독일어권을 보면 10만 명당 약 37명이 살해됐지만 2016년에는 10만 명 중 0.6명이 살해됐다.
핑커의 이론에 대한 반박도 물론 여러 가지다. 대표적으로는 세계의 가장 부유한 지역의 현실만 반영한다는 지적이다. 이 비판 또한 단순한 경제적 분석, 혹은 탈식민주의 같은 정치 철학을 출발점으로 전개할 수 있다. 그러나 찬반양론에도 불구하고 그 책의 데이터 기반 논리의 영향으로 직관이나 철학적 명상에서 나오는 막연한 비관론이 불가능해진 것만도 핑커의 중요한 기여로 볼 수 있다.
사실은 부유한 사회라도 불평등 효과를 무시하면 사회상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 나는 지난 일주일 동안 미국 캘리포니아 도시 패서디나에 있는 캘리포니아공대의 신고전 양식 ‘아테나움’ 교수회관에 묵으면서 매일 5분 거리에 있는 수학과 연구실로 출퇴근하며 거기 사람들과 여유롭게 수학 이야기를 나눴다. 이 도시는 로스앤젤레스 북동쪽에 위치한 작고 부유한 마을이어서 깨끗하고 전원적인 환경에서 평화로운 학자의 생활을 즐길 수 있는 여건이 잘 되어 있다. 그러나 공항에서 고속도로로 오가면서도 거대 도시 로스앤젤레스의 험난함을 약간씩 엿볼 수 있었다. 최근 조사를 보면 도시 노숙자 수가 약 7만명에 달하고 지난 2년 그 수가 4% 이상 늘었단다. 즉, 평화와 풍요가 일률적으로 늘지 않는다는 당연한 현실을 1세계 국가에서도 쉽게 목격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문제들에도 지난 35년 내가 개인적으로 경험한 미국 사회는 전체적으로 인자해지고 있다는 생각이다. 입국 수속이 점점 쉬워지고 사회적 다양성이 증가한 점에서 그런 예증을 본다. 내가 유학 갔던 1980년대에 80%를 차지하던 백인종이 2020년 인구조사에서는 57%로 떨어졌다. 2019년 퓨 연구재단 설문 조사에서 인종 다양성 증가를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이 전체 인구의 11%밖에 되지 않았다는 점도 중요하다.
참담한 사회상, 개인과 국가의 비애 그리고 역사의 우여곡절이 생생하게 펼쳐지는 <두 도시 이야기>는 영화나 드라마로도 자주 만들어져 인간사의 비극성과 영웅심이 강조되곤 한다. 그러나 평등과 박애 사상이 강했던 디킨스는 결론에서 처형당하러 가는 주인공의 예언을 통해 프랑스 혁명의 궁극적 효과를 상당히 긍정적으로 판단한다. ‘이 어둠으로부터 아름다운 도시와 총명한 시민들이 일어설 것이다. 그들은 수많은 승리와 패배를 거쳐서 진정한 자유를 위해 투쟁할 것이며 여러 해 뒤 이 시대의 악과 그 악의 부모이던 구시대의 악이 다 속죄되며 없어질 것이다.’
지금은 원활한 커뮤니케이션 덕에 극단적인 논쟁과 정치적 양극화를 미디어를 통해 경험할 기회가 많다. 그러나 현 시대의 요란한 뉴스도 혁명기의 혼란을 반영한 것이다. 정보와 통신의 진정한 글로벌화를 기반으로 진행되는 이번 혁명 역시 ‘최악의 시간’도 ‘최고의 시간’도 아닌, 결국은 세계 모든 사람이 서로의 고민을 공유하는 인자한 국제 질서로 점차 변해가는 과정의 일부라고 생각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