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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어느 시절의 숙취

등록 2022-10-27 18:34수정 2022-10-28 02:36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사사로운 사전] 원도 | 작가·경찰관

진득하니 마신 날 생각한다. 진짜 절주해야지. 숨을 깊게 내쉴 때마다 어제 마신 술과 안주의 종류까지 점칠 수 있는 보랏빛 공기가 뿜어져 나온다. 숨을 쉬고 있을 뿐인데 더 취하는 것만 같은 기분. 술에 취하다 숨에 취하는 돌고 도는 인생. 친구나 가족을 붙잡고 할 수 없는 얘기가 한가득이라 술에 의지해 변기를 붙잡고 버텨온 날이 많았다. 과거형으로 쓰기 어렵다. 지금도 그러고 있기 때문이다. 비데를 설치하지 않은 우리 집 변기는 차갑기만 한 것을. 여윳돈이 생기면 비데를 설치할까? 원소주를 주문하는 게 낫지 않을까?

일하는 동안 참 많은 주취자를 만났고, 만난 대다수를 집까지 데려다주거나 가족에게 인계하며 우리의 만남을 마무리했다. 주관적인 경험에 기반한 데이터를 추출해보자면, 주취자 대부분은 청년층 직장인이었다. 간혹 중년층, 이후로는 노년층이나 노숙자 순이었던 것 같다. 나와 비슷한 나이에 단정한 양복을 갖춰 입고 서류가방을 가슴에 꼭 끌어안은 채 길에 누워 자던 모습들. 저마다 다른 양복과 가방이었지만 하나의 인간 군상처럼 보이던 장면들. 얼마나 마셔야 저 지경이 되는지. 누운 자세로 거듭 토를 한 탓에 머리카락에 토사물이 다 묻어 있던 어느 젊은이의 숙취는 지금쯤은 끝이 났으려나. 불편한 회식 자리에서 강요로 마신 폭탄주와 같은 일상을 보내고 숙취를 해소하기도 전에 다시 일상으로 뛰어들어야 하는 당신, 그리고 나. 어쩌면 우리는 같은 모험을 하는 동료였을지도.

머리카락에 토사물을 잔뜩 묻힌 젊은이는 신고를 받고 출동해 인적사항을 묻던 나의 손을 잡았다. 그의 손에 묻어 있던 토사물이 나의 손으로 옮겨 왔다. 선생님. 집이 어디세요. 성함은요. 휴대폰 줘보시겠어요? 선생님! 학교에 다닐 때보다 선생님이라는 단어를 더 많이 뱉게 했던 그는 울면서 나에게 안겼고 나는 토의 악취를 흠뻑 들이켜며 그를 위로해줄 수밖에 없었다. 괜찮아요. 근무복이야 빨면 되죠. 무슨 일이 있어서 이렇게 술을 많이 자셨어. 괜찮아요, 괜찮아. 그런데 이제 저를 좀 놔주실래요? 냄새 때문에 저까지 토할 것 같아서….

숙취는 ‘이튿날까지 깨지 않는 술기운’(宿醉)을 뜻하지만 ‘일찍 성취함’(夙就)이라는 뜻도 가지고 있다. 젊어 숙취(夙就)한 후 숙취(宿醉)를 얻게 된 우리들. 이튿날을 넘어 사흘, 나흘까지 이어지는 술기운은 숙취라고 부를 수 없는 걸까. 술은 다 깼어도 흐트러진 정신까지 다잡기엔 이틀은 너무 짧다. 다이나믹듀오의 노래 ‘고백’에서도 ‘하루를 밤을 새면 이틀은 죽어’라는 가사가 있지 않나. 죽다 살아나기에도 이틀은 짧은 시간. 술기운이 가시고 나면, 현실감각을 깨워야 한다. 원하던 일을 숙취(夙就)하는 시절도, 밤거리를 숙취(宿醉)와 함께 헤맨 시절도 모두 건너왔고, 건널 거니까. 숙취로 고통받는 자를 외면하지 말아주라. 너 거기 있고, 나 여기 있다.

모든 것을 토해낸 그 사람을 집까지 데려다주고, 얼마간의 포옹으로 나에게까지 옮아버린 숙취(宿醉)를 깨끗이 씻는 게 내가 그날 밤 숙취(夙就)한 일이었다. 영문 모를 이유로 출동한 경찰관을 끌어안고 엉엉 울던 어느 젊은이는 다음날 숙취(宿醉)로 꽤 고생했을 것이다. 나는 지금도 선 넘는 음주로 숙취(宿醉)를 달고 산다. 주량을 줄일 생각을 하는 대신 효과 좋은 숙취해소제를 검색하며 다양한 임상시험을 진행하지만 역시, 원인은 과한 음주라서 큰 효과는 보지 못하고 있다.

오래 공들인 일을 숙취(夙就)하는 일은 드물어졌다. 물가가 많이 올라 술은 직접 담가 먹기 시작했고, 집에 술병은 늘어만 간다. 식당에서 파는 주류가 비싸져 더는 마음 놓고 취할 수 없게 되었으니 슬퍼해야 할지 기뻐해야 할지. 한병 더를 외치다가 계산서를 보고 술이 후다닥 깨어버리는 요즘. 어이구, 시간이 늦었네, 집에 가자, 어색한 연기로 외투를 고쳐 입으며 길을 나선다. 숙취에 젖던 시절이 끝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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