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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로버트 파우저, 사회의 언어] 영어에서의 이탤릭체 표기와 언어 포용성

등록 2022-10-26 18:32수정 2022-10-27 02:33

영어에서 사용도가 높고 고전적 느낌이 있는 글꼴의 이탤릭체 사례. 위키미디어 코먼스
영어에서 사용도가 높고 고전적 느낌이 있는 글꼴의 이탤릭체 사례. 위키미디어 코먼스

로버트 파우저 | 언어학자

시대에 따른 언어 변화는 언어학 원칙 중 하나다. 사회 변화에 따라 새로운 유행이 생기듯 언어의 유행도 새로 등장하고 사라진다. 사람들 이동이 늘면서 언어 역시 외부 자극을 받는 일도 자연스럽다.

미국에서는 성소수자 권리가 사회적 이슈로 떠오르면서 논바이너리(non-binery), 즉 남성과 여성으로 구분하는 기존의 이분법적 성별 구분에서 벗어난 표현을 쓰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여기에 더해 북부 지역에서도 남녀 구분이 따로 없는, 남부 방언의 2인칭 복수 속어 중 하나인 ‘y’all’을 선택적으로 쓰는 이들이 많이 늘었다. 주로 친근감을 드러낼 때 많이 쓰곤 한다.

이런 언어 변화는 비단 젠더 관련 이슈에만 두드러지지 않는다. 그 가운데 이탤릭체 사용 여부를 둘러싼 논쟁도 있다. 영어에는 다른 언어들과 마찬가지로 여러 부호와 글자체가 존재한다. 글자체는 서체 같은 스타일을 뜻하는 말이 아니다. 대표적으로 굵은 볼드체와 옆으로 기울여서 쓰는 이탤릭체를 들 수 있는데, 부호와 비슷하게 이 자체로 의미가 있어 이에 대한 사용 규칙도 존재하고, 사용 목적도 분명하다.

볼드체는 문장 안에서 눈에 띄는 효과가 있어 관습적으로 제목, 부제, 항목 등의 표시 및 강조를 위해 주로 사용하지만 정해놓은 규칙은 없다. 이탤릭체는 규칙이 좀 더 명확하다. 볼드체와 마찬가지로 강조를 위해 사용하기도 하지만 주로 책이나 영화, 신문, 잡지, 정기간행물, 앨범, 티브이(TV) 프로그램, 예술 작품 등 제목을 표시할 때 사용한다. 여기에 더해 영어 텍스트 안에서 외국어가 등장할 때 이탤릭체를 사용하는 것도 오랜 규칙이다.

다 아는 개념일 수 있지만 외래어와 외국어는 구분이 필요하다. 영어권의 외래어는 외국어에 뿌리를 두긴 했으나 다른 영어 단어들과 구분하지 않고 사용한다. 이에 비해 외국어를 사용할 때는 이탤릭체로 구분해서 표시한다. 예를 들어 영어권에서 ‘김치’는 외래어로 굳어져서 자연스럽게 쓰고 있지만 외래어로 아직 인정받지 않은 ‘된장’은 외국어이기 때문에 이탤릭체로 표시한다.

한국어에도 많은 외래어가 있듯 영어에도 외래어가 많다. 1066년 노르만족의 잉글랜드 정복으로 고프랑스어 단어가 영어에 영향을 끼친 이래 여러 언어권 단어들이 영어에 흡수됐다. 제국주의 시대 영국은 피지배 국가에서 단어를 받아들였고, 미국은 긴 시간 이민의 역사를 써오면서 다양한 언어권의 단어를 받아들였다. 20세기 후반 히스패닉 인구가 급증하면서 스페인어 영향이 커졌는데, 특히 음식 명칭에서 증가세가 뚜렷하다.

이런 상황에서 이탤릭체 사용을 둘러싼 논쟁이 등장했다. 쟁점은 크게 두가지다. 하나는 외국어와 외래어의 기준을 누가 정하느냐는 부분이다. 어떤 근거와 권위로 외국어의 단어를 영어 단어로 받아들이느냐 마느냐를 결정하느냐 하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영어는 한국이나 프랑스처럼 언어를 관리하는 정부기관이 따로 없다. 다만 학계와 출판계의 관례와 합의 속에 규칙이 만들어질 뿐이다. 따라서 <옥스퍼드 영어사전> 같은 권위 있는 사전의 역할이 크다. 지난해 ‘반찬’ 같은 음식 단어뿐만 아니라 ‘대박’과 ‘파이팅’이 사전에 실리면서 이제 이런 단어들은 외래어로서 영어의 정식 단어가 되었다. 그런데 과연 이 사전에 부여된 힘과 영향력은 누가 부여한 것이며 과연 적절한 것일까?

논쟁의 지점은 또 있다. ‘외국어’의 정의를 둘러싼 것이다. 이민자가 많은 미국과 영국 두 나라의 학계와 출판계에서 영어를 기본으로 설정해 외래어와 외국어의 기준을 정하는 것이 그 자체로 배타적인 태도이며 영어 패권을 강화, 유지하는 양상이라는 점이다. 영어가 아닌 다른 언어를 애초에 외국어로 설정하고 그 가운데 선택적으로 외래어로 받아들인다는 발상이 차별적 태도라는 지적이다.

이런 논쟁은 결국 영어 문장에서 사용하는 모든 단어를 이탤릭체를 통해 구분하는 대신 모든 단어를 구분하지 않음으로써 차별하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에까지 이르렀다. 외국어, 외래어 차별 없는 이런 태도야말로 사회의 다양성을 포용하는 태도라는 것이다. 영어권에서는 낯선 주장일 수 있다. 하지만 한국어를 생각하면 쉽다. 어떤 외래어나 외국어도 영어의 이탤릭체 같은 구분이나 차별이 없기 때문이다. 모든 단어를 같은 글자, 같은 방식으로 사용하는 것은 언어의 포용성 측면에서 보면 매우 선구적인 방식이다. 영어의 다양성과 포용성을 고민하는 이들이라면 한국어 표시법을 참고해도 좋을 것이라는 말이다.

영어에서 사용도가 높고 고전적 느낌이 있는 글꼴의 이탤릭체 사례. 위키미디어 코먼스
영어에서 사용도가 높고 고전적 느낌이 있는 글꼴의 이탤릭체 사례. 위키미디어 코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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