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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나는 외로운 한 명의 운전사

등록 2022-09-22 19:07수정 2022-09-23 02:36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사사로운 사전] 원도 | 작가·경찰관

서울만큼 갈림길 많은 도시에서는 내비를 보고 운전하는 게 힘들다지만, 내비도 없이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며 우당탕탕 굴러가는 내 삶의 자동차를 운전하는 일보다야 힘들쏘냐.

새벽이 짙게 내린 홍대 거리에서 승무를 추듯 우아하고도 절박하게 손을 흔들어봐도 도무지 택시는 잡히지 않는다. 거리는 무용장으로 변해 저마다 목적지를 떠올리며 애타게 손을 뻗는다. 그 춤사위가 퍽 쓸쓸하다. 안개와 술 냄새가 섞인 거리에서 호흡하는 것만으로도 취기가 진해진다. 모두들 어디로 가시나요. 당신들이 돌아갈 곳엔 사랑하는 사람이 기다리고 있나요. 동물이 기다리고 있을까요. 할 일만 잔뜩 쌓인 당신만의 고독으로 들어가는 건 아니길 바라요. 부엌에 쌓인 설거짓거리가 떠오른다. 말리기 위해 펼쳐놨다가 며칠 동안 접지 않고 방치한 우산이, 창틀에 쌓인 벌레 사체가, 유통기한이 지났지만 버리지 못한 우유가 함께 거리를 떠돈다. 택시는 도무지 잡히지 않는다. 일반택시 호출은 1만7천원이지만 프리미엄 택시 호출은 6만3천원이다. 나는 조속한 귀가를 위해 4만6천원을 더 치를 여유가 없다.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하나. 더욱 애달픈 춤사위를 펼치는 것뿐. 무릎과 정강이에는 불과 몇시간 전 지하철역에서 굴러떨어지면서 얻은 멍이 선명했다. 멍만큼이나 푸르른 새벽, 길거리 무용수가 된 나는 입술이 조금 부르텄다.

내비를 봐도 차선은 도통 헷갈리기만 하고 언제 치고 빠져야 할지, 어떤 능숙함으로 스리슬쩍 무리에 합류해야 할지 알려주는 이 하나 없는 인생이었다. 머뭇거리다간 뒤에서 가차 없는 클랙슨이 칼처럼 날아왔다. 공사 현장에서 쓰이는 대형 차량에선 간혹 뱃고동과 비슷한 경적 소리가 났다. 내가 헤매는 곳은 어쩌면 도로가 아니라 망망대해일지도 몰라. 그리 생각하니 헤매는 게 썩 당연한 일처럼 느껴져 덜 슬펐다.

택시를 타지 않고는 뒷자리에 앉아 경치를 관망할 일이 없다. 나는 신호를 지키는 것에, 옆을 빠르게 지나가는 오토바이를 경계하는 것에 급급한 외로운 운전사일 뿐. 자고로 남의 차를 얻어탈 때만 겨우 숨 돌리며 창밖을 바라볼 수 있을 뿐. 내 차를 운전해줄 사람이 없어 스스로 몰아야만 하는, 대타가 없어 휴가를 갈 수도 없는 외롭고도 팍팍한 운전사일 뿐. 애초에 본인의 삶을 관망한다는 건 가능하지 않을 뿐.

저마다 출력과 옵션이 다른 차를 타지만 비싸고 옵션이 많은 차라고 올림픽대로와 강변북로를 쌩쌩 달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저렴하고 옵션이 적은 차라고 입장이 거절되는 것도 아니다. 모든 건 마음가짐에 달렸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초라한 외관에 자꾸만 조용해진다. 누가 내 앞을 위협적으로 끼어들어도 당당히 클랙슨 한번 울리지 못하는 외롭고도 간이 작은 운전사. 이 주행은 언제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을까.

부르튼 입술은 낫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정강이 멍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푸른색이었던 게 지금은 보라색과 노란색이 섞여 백화점 지하 1층에서 파는 마카롱과 비슷한 색이 되었다. 연식이 오래될수록 연비가 안 좋아지는 차를 모는 운전사인 나는 자주 졸리다. 출력도 떨어지는지 마음이 들뜨거나 하고 싶은 일이 줄어만 간다. 최근 집 근처 발레학원에서 상담받고 왔는데 새로운 도전에 대한 두근거림보다는 새로운 고정비용 탄생에 대한 걱정만 안고 돌아왔다.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알뜰 주유소만을 찾아 나서는 외로운 운전사의 사정이 깊다.

사랑을 속삭인 지 오래됐다. 오늘도 나는 무엇을 찾아 거리를 헤매나. 지난 장마 영향으로 차량 수천대가 침수됐다지만 도로는 언제나 만석이다. 피해자의 피해는 전통적으로 피해자의 몫이었다. 회사 차량은 선팅을 해주지 않아 한낮의 조그만 햇살에도 낯이 너무 뜨거워진다. 맞은편 차량의 라이트가 강렬해 하는 수 없이 눈을 감았다. 은퇴하지 못한 무용수이자 운전사의 하루가 이렇게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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