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4일 경북 포항시 남구 동해면 도구해수욕장 주변에 제11호 태풍 힌남노 영향으로 내륙에서 떠내려온 자동차가 모래에 파묻혀 있다. 연합뉴스
최우리 | 경제산업부 기자
지난여름, 20여년 만에 중학교 동창을 만났다. 여느 중학생들이 그렇듯, 나는 당시를 내 세계의 근간을 채우고 세상을 탐색하던 시절로 기억한다. 반면 친구는 반지하였던 집이 침수된 시절로 회상했다. 친구는 뺨을 때려가며 잠자던 동생을 깨워 겨우 탈출했다고 했다. 친구의 아픔을 몰랐다는 게 참 미안했다. 우리가 살던 동네는 서울 강남이었다.
지난달 8일 서울 강남 일대가 침수된 날, 인근에 혼자 살고 계신 어머니께 연락했다. 가족이 함께 쓰는 차가 침수된다 해도 집 밖으로 절대 나서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신혼집으로 계약할 뻔한 서울 동작구 이수역의 빌라 여러곳이 침수된 현장 영상뉴스를 보며 재난이 나와 이웃의 삶과 매우 가까이 있다는 생각에 한동안 마음이 복잡했다.
도저히 일어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일이 일어나는 것을 ‘블랙스완’이라고 한다. 2008년 세계금융위기 때 등장한 용어다. 이 용어에서 파생된 ‘그린스완’이라는 개념은 기후변화가 일으키는, 회복 불가능한 손상을 초래하는 사회 전반의 위기를 말한다. 폭우와 태풍 피해로 서울과 경북 포항 등지에서 평범한 이웃들이 가족을 잃은 황망한 소식을 보면서 이 용어가 떠올랐다. 누구라도 기후재난의 피해자가 될 수 있는 시대를 사는 불안함이 한국 사회를 관통하고 있음을 새삼 느낀다.
기후위기에 저항하는 삶을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의미를 뽑자면 ‘현재 사회 구조에 대한 전환·전복’일 것이다. 지금까지 충분하고 완벽하다고 생각했던 많은 것들이 불충분하고 부족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처럼 전환하거나 전복해야만 하는 시대에 필요한 것은 상상력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전환과 전복에 가장 빠르게 대응하고 있는 분야는 기후위기에 책임이 있는 경제·산업 분야다.
보험업도 그중 하나다. 방송인 타일러 라쉬는 과거 <한겨레> 인터뷰에서 “미국 보험사들은 이상기후로 인한 재난을 우려해 해안가 지역 주택의 보험료를 더 높게 매기고 있다”고 말했다. ‘럭셔리한 오션뷰’이지만 재난에 빈번하게 노출되기 때문이다.
올해 2월 나온 보험연구원의 ‘생명보험에 대한 기후변화의 영향’ 보고서에서는 이제는 손해보험뿐 아니라, 생명보험 관점에서도 기후변화의 영향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미 풍수해보험과 화재보험, 자동차보험, 농작물재해보험 등 재해보험 가입률과 지급률은 매해 오르고 있다. 보험사는 영리기업이지만, 이상기후와 관련한 다양한 보험상품을 마련하지 않으면 사회적 지탄을 받게 생겼다.
“기후위기를 먼 미래의 문제로 생각하는 게 가장 큰 문제예요. (정부와 기업 모두) 한다고 하는데 제가 볼 때는 너무 변화가 느려요. 걱정됩니다.”
올해 5월 책 <보험, 기후위기를 묻다>를 쓴 남상욱 서원대학교 경영학부 교수도 올여름 재난을 지켜보며 착잡했다고 토로했다. 남 교수는 보험사와 정부가 더욱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한다고 했다.
“보험사들은 자연재해로 인한 피해는 현재 면책 조항으로 두려 해요. 책임지다가는 파산할 수 있기 때문이죠. 더 문제는 기후 관련 상품을 만들려고 해도 결국 보험료율을 따져야 하는데 축적된 정보가 없으니 자체 보험상품을 만들 능력이 없습니다.”
온실가스 감축이 온난화와 싸우는 근본적이고 장기간에 걸친 숙제라면, 이상기후에 당장 대비할 수 있는 자본·사회 체계 구축은 기본적·단기 과제다. 대심도 빗물 터널, 지옥고(반지하·옥탑방·고시원) 줄이기, 보험상품 마련 등 모든 정책적 사고를 할 때 기후위기 대응이라는 원칙이 적용되어야 한다. 역사적으로도 공고했던 체제의 전환·전복은 항상 도전적이었다. 어렵고 복잡해 보여도 장·단기 과제 풀이를 해야 소도, 외양간도 허망하게 잃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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