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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로버트 파우저, 사회의 언어] 언어지도의 변화: 분포에서 비율로

등록 2022-09-07 18:36수정 2022-09-08 09:49

1890년 〈Meyers Lexikon〉 백과사전의 유럽 언어지도. 위키미디어 코먼스
1890년 〈Meyers Lexikon〉 백과사전의 유럽 언어지도. 위키미디어 코먼스

로버트 파우저 | 언어학자

여행의 즐거움 중 하나는 새로운 언어를 만나는 것이다. 여행지에서 그리 멀리 이동하지 않아도 다른 언어나 지역색 강한 방언을 만나곤 한다. 언어 또는 방언 분포는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말까지 흥미로운 연구 주제였다. 18세기 계몽주의에서 비롯한 현대언어학은 19세기 후반부터 크게 발전했다. 산업혁명으로 인한 교통 발달로 여행과 이동이 늘어났고, 언어 다양성에 관한 관심도 높아졌다. 여기에 제국주의 가속화로 아프리카를 비롯해 아시아와 태평양 인근 지역이 몇몇 제국의 지배를 받기 시작하면서 피지배 민족들의 언어 조사가 매우 활발해졌다. 당시 언어학자들은 새롭게 취득한 정보를 통해 다양한 언어의 음성, 어휘, 구조의 상관관계를 밝혀내기도 했으니, 돌이켜보면 현대 언어학의 토대를 마련한 비교언어학의 황금시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비교언어학은 언어학 역사에서 최초로 현장조사를 시도했다. 이들은 조사 대상 지역 현지인들과 천천히 대화를 나눠가며 해당 언어의 특징과 방언 분포 등을 파악해 나갔다. 그렇게 획득한 정보에 19세기 후반 발달한 지도 작성법을 접목해 만든 것이 바로 언어지도다. 유럽에서는 수많은 언어와 방언의 분포를 자세히 기록한 지도책이, 북미에서는 선주민 언어의 분포를 기록한 지도책이 출간됐다.

일반적으로 언어지도는 같은 어파(語派)와 어군(語群)끼리 비슷한 색으로 표시한다. 유럽 지역에서 로망스어는 파란색으로, 게르만어는 빨간색으로, 슬라브어는 초록색으로 표시하는 식이다. 이런 지도는 예쁘기도 하고 흥미롭기도 하지만 예민한 부분도 존재한다.

우선 언어의 분포 양상은 국경과 달라 언어지도는 일반 지도와 차이가 있다. 유럽 국가 중 벨기에는 언어지도상 존재하지 않는다. 북쪽은 네덜란드어, 남쪽은 프랑스어를 쓰기 때문이다.

여러 언어를 사용하는 같은 지역의 언어 표시 역시 눈여겨볼 부분이다. 발칸반도 여러 지역에서는 두개 이상의 언어를 사용하는데, 그런 경우 각각의 언어를 다른 색 줄무늬로 표시한다. 벨기에 수도 브뤼셀 지역은 작은 동그라미 안에 공용어로 채택한 네덜란드어와 프랑스어, 두개의 언어를 줄무늬로 표시했다. 하지만 모든 언어를 다 표시할 수는 없으니 엄연히 같은 지역에서 사용하고 있는 언어지만 지도 위에는 존재하지 않는 경우가 생긴다. 여기에는 얼핏 봐서는 알 수 없는 언어 사이의 권력관계, 매우 복잡한 불평등과 갈등관계가 존재하기 마련이고, 20세기 말 유고슬라비아 붕괴와 내전의 원인 중 하나도 바로 언어 문제였다.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전통적인 언어지도의 한계는 더욱 두드러졌다. 이민자가 늘어나고 사람들의 이동이 잦아지면서 지역마다 언어 분포가 훨씬 복잡해졌다. 전통적으로 프랑스어를 주로 써온 캐나다 퀘벡주 몬트리올은 프랑스어 보호를 위해 다양한 법을 도입하면서까지 노력하고 있지만, 오늘날 이 지역 가정에서 프랑스어를 쓰는 이들은 49% 남짓이다. 13%는 영어, 33%는 다른 언어, 5%는 두개 이상의 언어를 사용한다. 이민자는 계속 늘어날 전망이니 다른 언어 사용자가 프랑스어 사용자를 따라잡을 날이 머지않은 듯하다.

언어 다양성이라면 빼놓을 수 없는 인도 역시 전통적인 언어 분포가 도시를 중심으로 갈수록 복잡해지고 있다. 칸나다어를 사용하는 지역의 가장 큰 도시로 꼽히던 남쪽 카르나타카주 벵갈루루시는 정보기술(IT)산업의 발전으로 인도 전역은 물론 해외에서도 사람들이 유입돼 약 100여개 언어가 사용되고 있고, 정작 칸나다어를 사용하는 인구는 44%에 머문다. 언어지도에 이 지역의 언어는 어떤 색깔로, 어떻게 표시해야 할까. 몬트리올과 벵갈루루 같은 다중언어 도시 안에서도 주로 하나의 언어를 사용하는 곳도 있고, 여러 언어를 섞어 쓰는 지역도 있으니 언어 분포 현황을 깔끔하고 정확하게 표시한 지도를 만드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 됐다.

나아가 이러한 현실은 언어 사용이 점차 특정 지역과 분리되고 있음을 말해준다. 다시 말해 이제 일정 지역에서의 언어는 그 분포보다 비율의 중요성이 더 커지고 있다는 의미다.

언어 비율을 잘 표시하는 지도는 한국 현실에서도 유의미하다. 이미 도시뿐만 아니라 도시 인근 지역, 나아가 농촌 지역 안에서도 한국어가 아닌 다양한 언어 사용자가 늘고 있다. 그렇게 보면 이러한 현황을 한눈에 보여주는 한국의 언어지도가 등장할 날이 머지않은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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