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로운 사전] 원도 | 작가·경찰관
요즘 아주 곤혹스러운 사정이 생겼다. 정말로 글이 안 써진다. 진작 탈고했어야 할 에세이 원고는 통 진척이 없고 내년 상반기 탈고해야 하는 소설 원고는 뭉툭한 단상만 툭툭 뱉고 있다. 칼럼 연재만 겨우 맞추고 있는 셈이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 많아 메모를 손에서 놓지 않는 것도 모자라 혹여 모아둔 언어가 새어나갈까 일기도 조심히 쓰던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나는 크게 다르지 않은데. 이어지는 직선 위의 하루일 뿐인데. 그 하루를 차지하던 덩어리의 주체가 달라진 이유가 있을까.
오랜 친구는 내가 더 이상 우울하지 않기 때문에 예전만큼 글을 쓰지 못하는 거라고 나름의 진단을 내려주었다. 친구 말을 듣고 곰곰이 생각해보니, 확실히 개인적인 사정이 나아지긴 했다. 삼십대가 되면서 나를 좀먹는 무언가를 조금 더 손쉽게 포기할 수 있게 됐다. 회사에서 입지가 좁아지는 건 아닌지 괴로워하는 밤도 확연히 줄었다. 혼자 사물놀이를 한다 해도 인정이나 사랑을 받기 어려운 게 무릇 회사생활이라는 걸 가슴으로도 인정하면서부터였다. 따가운 밤송이 같아 곁에 두면 찔리기만 했던 인간관계도 전전긍긍하기보다 서서히 멀어지게 놔둔다. 주위에는 언제 만나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눠도 불편한 기색 없는 사람들로만 채우고 있다. 맞지 않는 사람까지 맞추려 하지 않는다.
어찌 보면 성공률 낮은 일에 쏟을 에너지가 없다는, 청춘의 몰락일지도 모른다. 태초에 탑재되지 않은 항목을 갈망하는 일도 줄었다. 그래도 재정적으로나 여타 어려운 상황에서 완전히 의지할 수 있는 존재를 가진 사람은 참 부럽다. 외모가 잘나거나 체격이 좋은 사람도 부럽다. 부엌 상부장에 손이 닿지 않아 보조 계단을 사용할 땐 사무치게 부럽다. 그래도 어쩔 텐가. 가질 수 없는 걸 투덜거려봐야 나만 비참하다. 자신을 비운의 주인공으로 다루는 것도 이젠 지친다. 이러쿵저러쿵 떠들 에너지가 없다. 어쩌면 문학을 이어갈 에너지도 고갈된 게 아닐까, 두려운 마음이 든다.
‘문학’의 사전적 의미는 사상이나 감정을 언어로 표현한 예술이다. 전례 없는 안정으로 일상의 많은 부분에 침투해 있던 우울을 조금씩 몰아내면서 언어로 표현할 특별한 사상이나 감정이 희미해졌는지도 모른다. 위대하다고 일컬어지는 소설이나, 다양한 책장에서 홀로 찾아낸 위대한 글을 읽으면서 문학이란 자고로 상처를 가진 이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래서, 가장 큰 상처를 입었을 때 아득바득 글을 썼다. 이왕 생긴 상처라면 문학으로라도 풀어내야 덜 손해인 것 같았다. 문학은 자고로 평이하지 않은 사상이나 감정을 표현해야만 한다고, 에너지가 넘쳐 감정에 쏟는 힘 또한 넘쳤던 어린 시절엔 그렇게 생각했었다.
객관적으로 괜찮은 상태라 보기는 힘들지만 지난 20대보다는 안정된 하루를 보내는 지금의 나는, 나 자신에게 만족할까? 평온한 삶이지만 문학인으로서의 무기는 사라진 사람, 또는 혹독하거나 거친 삶을 보낼지언정 문학인에게 필요한 ‘문학적 사정’은 풍요로운 사람. 꼭 둘 중에 무언가를 골라야 한다면 난 전자라고 단언할 수 있나. 평범하게 살고 싶다고 노래 불렀지만 정작 남들과는 다소 다른 방식으로 찾아오는 비극에 의지하며 살아온 건 아닐까. 자우림의 노래 ‘슬픔이여 이제 안녕’의 가사가 사무친다. ‘나의 가장 오랜 벗이여. 나는 네가 없이는 내가 아닐 것 같아….’
당연하지만 비극만이 문학하는 사람의 사정은 아니다. 그런 단정이야말로 억측이며 작가의 노력을 뭉개버리는 무례다. 그렇다면 나에게 남은 과제는 지금에라도 나를 찾아와준 안정과 일상의 풍요를 마음껏 즐기는 것, 슬금슬금 피어오르는 행복을 글로 써보는 것이다. 사실 능력 부족이라는 개인적인 사정을 몇개의 문단으로 포장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지금 이 글은 지난 칼럼보다 다소 나은 마음으로 썼다. 그 사실만 생각하기로 했다, 지금은. 이 글을 읽는 모든 이의 사정이 조금이라도 행복해지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