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최근 경찰 치안감 인사 번복 과정을 두고 “중대한 국기문란”이라 했다. 국기문란이란, 나라의 기초(國基) 또는 기강(國紀)을 어지럽히는 행위를 말한다. 크게는 헌정 질서를 무너뜨리는 쿠데타에서, 작게는 중대한 명령불복종 및 항명 등이 해당될 수 있다. 그런데 헌법에도, 형법에도 ‘국기문란’이란 단어는 없다. 내란죄를 규정한 형법 91조에 ‘국기문란’ 아닌, ‘국헌문란’에 대해 ‘헌법 또는 법률에 정한 절차에 의하지 아니하고 헌법 또는 법률의 기능을 소멸시키는 것’이라고 정의 내렸다. 국기문란은 비슷한 의미지만, 법적 공식 용어는 아닌 셈이다.
1980년 전두환 신군부가 5·17 비상계엄 확대를 목적으로, 당시 이학봉 보안사 대공처장 주도로 정치인, 재야인사, 학생들에 대한 대대적인 수사계획서를 작성한 바 있다. 이때 대상자 분류가 ‘권력형 부정축재자’와 ‘국기문란자’였다. 지명수배자 329명 중 국기문란 대표적 인물이 김대중이었다. 이후 잘 안 쓰이던 ‘국기문란’은 박근혜 대통령이 자주 쓰기 시작했다.
박 대통령은 재임 기간 중 “국기문란”을 세 번 언급했다. 2013년 7월 국가기록원의 노무현 대통령 서해북방한계선(NLL) 대화록 삭제 논란 당시, 국무회의에서 “국기를 흔드는 일”이라 말했고, 청와대는 “사초 실종은 국기문란”이라 했다. 검찰 수사가 진행됐으나 2015년 2월 법원은 “초본은 속성상 폐기하는 것이 타당하다”며 무죄 선고했다. 박 대통령은 2014년 12월 ‘청와대 비선실세’ 문건 유출 사건 때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국기문란 행위”라고 했다. 또 검찰 수사가 이어졌지만 문건 유출을 지휘했다는 조응천 전 비서관은 1·2심 모두 무죄 선고 받았다. 2016년 8월 우병우 민정수석 비리 의혹 감찰 내용 일부가 언론에 보도되자 청와대는 긴급성명을 발표해 “감찰 내용 외부 유출은 국기문란”이라 했다. 이후 이석수 감찰관은 무혐의, 우 수석은 징역 1년형을 받았다. 박 대통령 이후부터는 여야 가릴 것 없이 다 ‘국기문란’이라는 용어를 자주 썼다. 대선 과정에서 불거진 ‘고발사주’ 의혹, 문재인 정부 대북 관련 사업 등 웬만한 일에는 여야가 서로 국기문란이라 하는 등 이젠 정치권 상용어가 됐다. 윤 대통령의 ‘국기문란’ 언급 나흘 만인 27일, 김창룡 경찰청장은 사의를 표명했다.
권태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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