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지난달 13일 서울 종로구 통의동 제20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브리핑룸에서 열린 2차 내각 발표에서 한동훈 법무부 장관 후보자를 소개하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직장 인연’의 줄임말. 이 말은 ‘원고(윤석열 검찰총장)와 한동훈은 직연 등 지속적인 친분관계가 있어 공정한 직무수행이 어렵다고 판단될 수 있는 관계’라는 2021년 10월 서울행정법원 1심 판결문에 등장한다. 사전에도 안 나오지만, 이미 직장인들 사이에선 전통적인 혈연, 지연, 학연보다 더 쓸모 있는 인맥이다. 하기야 월급쟁이들한테 직장에서 맺어진 인연만큼 소중한 게 있을 수 없지.
우리에게 ‘연’은 줄(연줄)이나 끈으로 인식된다. ‘줄’은 그것을 잡고 있는 사람들을 이어주고 질러갈 수 있는 ‘지름길’을 낸다. 줄이 닿기만 한다면, 줄을 댈 수만 있다면 뭔 짓을 못하랴. 급하면 남과 다름없는 ‘사돈의 팔촌’과 ‘처삼촌’도 소중한 핏줄이고, 스쳐본 적 없던 10년 선후배도 ‘성님’ ‘동상’으로 탈바꿈한다. 데면데면하게 있다가도 동향이면 ‘우리가 남이가’ 하며 어깨동무를 한다.
이런 시대착오적인 인연에 비해 ‘직연’은 얼마나 합리적이고 현대적인가. 가족보다 더 오래 동고동락하며 맺어진 ‘직연’이야말로 검증 가능한 인연이다. 힘 있는 사람과 연을 맺을 수만 있다면 출세까진 아니더라도 평탄한 직장생활 정도는 보장된다.
하지만 인연맺기를 삶의 문법으로 익힌 사람은 이 세상을 인연인 것과 인연 아닌 것으로 나누고, 자타, 피아, 시비, 선악을 분별함으로써 급기야 민중이 부처이고 민중 안에 하나님이 있다는 걸 모른 채 살게 된다. ‘끈’을 잘못 잡아 이권과 억견의 ‘끄나풀’이 된 사람들도 허다하다. 인연을 떨쳐버려야 작게는 좋은 정치를, 크게는 생사의 길을 뛰어넘어 깨달음에 이른다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