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놀랍게도, 말은 용맹한 자보다 비겁한 자들의 편. 그중 최고의 비책이 ‘돌려 말하기’(간접화행) 전법. 명령, 요구, 지시의 의도를 담은 말을 질문, 청유, 단순 진술의 말로 바꿔 상대방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한다. ‘우리 지금 만나!’라 했다가 거절당하느니, ‘약속 있어요?’라 물으면 빠져나갈 구멍이 생긴다. 앞사람이 서 있을 때 ‘어이, 앉아!’라 하지 않고 ‘앉읍시다.’ 같은 청유형이나 ‘앉아 주실래요?’ 같은 의문형으로 말한다. 상대방과의 관계를 경색시키지 않고, 상대방에게 선택권을 넘겨주는 고도의 생존전략이다.
이와 정반대 효과를 부르는 표현이 있는데, 바로 ‘시끄러워!’이다. ‘집 옮겨!’ ‘나무 잘라!’처럼 명령형은 동사를 쓰지, 형용사를 쓰진 않는다. ‘방이 깨끗하구나’ ‘구름이 희네’ ‘덥군!’ 식으로 감탄형으로는 자주 쓴다. ‘시끄러워’는 지금의 떠들썩한 상황을 담담하게 전달하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감탄의 한계를 뛰어넘어 가장 강력한 명령의 언어가 된다. 듣기 싫은 말을 잘 참는 척하다가 한 옥타브 올려 냅다 내지르는 괴성. ‘조용히 해!’ ‘입 다물어!’ ‘닥쳐!’ 같은 노골적인 명령이 없어도, 대화는 멈추고 타협의 가능성은 불타버린다. ‘네까짓 게, 어디서 감히.’ 같은 귀족적 우월감도 얹힌다. 이렇게 강력한 명령의 기능을 수행하는 형용사는 본 적이 없다.
부모, 선생, 성질 사나운 수많은 갑들, 욱하는 성격의 사람들이 흔히 쓴다. 힘의 과시임과 동시에, 자신의 논리 없음과 상대를 설득할 능력이나 의지 없음을 천하에 선언하는 패악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