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아이를 돌보는 시기에만 하게 되는 특이행동이 있다. 다른 행동, 예컨대 ‘어부바’를 해주거나 밥을 떠먹이거나 재우는 일은 (마음만 굳세게 먹는다면) 가족이나 친구에게도 할 수 있다. 하지만 괴기스러운 사이가 아니라면, 배설을 돕는 일은 결단코 하지 않는다.
기저귀를 떼고 나니 아이는 수시로 ‘아빠, 쉬’ 하며 화장실 동행을 요구했다. 그러면 아내에게 “오줌 쌔우고 올게.”라 한다. 잠자기 전이나 외출 전엔 “오줌 쌔웠어?”라며 확인한다. ‘싸다’의 사동형으로 ‘싸이다, 쌔다’란 말이 있지만 성에 안 찼다. ‘자다’가 ‘재우다’인 것처럼, ‘싸다’도 ‘쌔우다’지! ‘누다’에서 온 ‘누이다, 뉘다’도 안 썼다. ‘오줌싸개’란 말에서 보듯이 아이는 의지적인 ‘누기’보다는 제어불능의 ‘싸기’에 가까우니까! 나는 이 말을 자랑스럽게 썼다. 바지를 벗기고 ‘쉬’라는 효과음을 내고 똥을 닦아주고 바지를 올리고 손을 씻겨야 하는 이 수고로움을 ‘싸게 하다’로 어찌 담으리오.
‘먹이다, 입히다, 울리다, 웃기다, 깨우다’ 같은 사동사는 두개의 사건을 하나의 사건처럼 표현한다. 그 안에는 시키는 주체와 시킴에 따라 행동하는 주체가 다르다. 두 주체의 관계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표현이 달라진다. ‘옷을 입히다’는 아이에게 ‘만세’를 하게 한 다음에 보호자가 옷을 직접 입혀 주는 거라면 ‘입게 하다’는 “옷 입어”라고 말만 할 거 같다.
‘자립’은 이를테면, 오줌을 ‘쌔우다’에서 ‘싸게 하다’를 거쳐, 종국에는 스스로 ‘싸는’ 여정이랄까?(어휴, 늙음은 처음 자리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