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양말 속 발가락처럼 낱말도 꼼지락거린다. 가만히 있는 듯하지만 스멀스멀 다른 뜻으로 옮아간다. ‘납작하다’는 ‘납작한 돌’, ‘납작한 코’처럼 생김새가 평평하고 얇은 상태를 뜻했다. 비유적으로 쓰여 잘난 체하는 사람의 콧대를 납작하게 꺾어줘야 직성이 풀리기도 하지만, 일보전진을 위한 무한후퇴의 자세로 오늘도 납작 엎드려 산다.
요즘엔 다양하고 입체적인 대상이나 현상을 지나치게 단순화하여 이해한다는 뜻으로 쓰인다. ‘‘노인’이라는 말 한마디가 내 인생을 납작하게 만들었다’, ‘코로나는 우리 생활을 납작하게 만들었다’. 누군가를 한마디 말로 특정 부류에 포함시키면, 당사자의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이야기가 지워진다. 복잡하고 입체적인 현상을 한두 가지 원인이나 갈래로 단순화하는 것도 ‘납작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세대론은 세대 내부의 관계를 납작하게 만든다’, ‘불평등 담론은 너무나 빈약하고 납작하다’, ‘인구 문제를 저출생 문제로만 접근하면 논의를 납작하게 만든다’. 복잡한 문제를 ‘말의 압착기’로 내리눌러 마치 쉽고 간단한 문제로 뒤바꾸면 해결될까. 아니, 그냥 ‘압사’할 뿐.
‘납작하다’는 단순화에 대한 예민한 반발심이자 그런 평면적인 이해 방식을 그냥 내버려두지 않겠다는 다짐의 말이다. 매사를 한두 가지 원인으로 되돌리는 환원주의에 대한 거부이기도 하다. 장애인을, 여성을, 노인을, 노동자를, 아니 모든 생명을 납작하게 만들지 말라. 우리의 문제는 다차원적이다. 이 말의 반대편에는 ‘고유성, 입체성, 복합성, 두툼해지기, 부풀어 오르기’ 같은 말이 자리 잡고 있다. 즉,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