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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빵과 장미

등록 2022-03-02 18:15수정 2022-03-08 10:49

[숨&결] 김준 | 서울대 기초과학연구원 연수연구원

처음 방문한 생물학 연구실에 대한 기억은 일하는 여성이 가득 찬 장면에서 시작된다. 바람 소리가 가득한 공간에는 한창 일하고 있는 여성 두세명만 있었다. 그들이 앉아 있던 실험대는 한쪽 면만 빼고는 모두 꽉 막혀 있었다. 남은 한 면에는 투명 플라스틱 칸막이가 달려 있었는데, 그 칸막이 밑으로는 손을 집어넣을 수 있을 정도의 틈이 있었다. 바람은 그 작은 틈을 통해 실험대 안에서 바깥쪽으로 끊임없이 쏟아져 나왔다. 외부에서 어떤 오염물질도 들어오지 못하게 막으려는 장치였다.

그들은 그 틈 사이로 양손을 집어넣은 채 쉴 새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한 손에는 손바닥 가득 들어오는 널찍한 플라스틱 판이 쥐어져 있었다. 식물이 잘 자라도록 영양분을 듬뿍 담아둔 젤리가 얇게 깔린 판이었다. 다른 한 손으로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 무언가를 그 판에 새겨넣고 있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고작해야 길이가 0.5㎜도 채 되지 않는 작디작은 씨앗을 하나씩 그 얇은 판에 심고 있는 것이었다. 씨앗 심는 법을 모르는 초보자도 연구를 시작할 수 있도록, 숙련된 전문가들이 그 노동을 담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박사 과정을 밟는 동안 지냈던 연구실에도 전문가가 따로 있었다. 연구실에서는 ‘예쁜꼬마선충’이라는 1㎜ 남짓한 작은 벌레를 키우고 있었는데, 벌레를 살려둬야 연구를 계속할 수 있으니 살 곳과 먹거리를 끊임없이 제공해야 했다. 일단 벌레들이 살아갈 젤리로 된 집을 준비해야 했고, 먹이로 쓰는 대장균을 따로 키운 뒤 젤리 집 위에 얇게 깔아 벌레들이 기어다니며 먹을 수 있게 해야 했다. 씨앗을 심을 때처럼 오염 없이, 젤리 집 위에는 대장균과 예쁜꼬마선충 말고는 다른 어떤 생물도 존재하지 않도록 청결을 유지해야만 했다. 그래야만 실험 결과가 다른 생물로 인한 게 아니라는 결론을 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일은 단기간에 쉽게 숙달되는 일은 아니었고, 마찬가지로 여성 전문가가 그 일을 담당했다. 그는 어떤 오염도 없이 젤리 집을 가꾸고 대장균 먹이를 키워내 연구를 시작할 수 있게 했다. 내가 지금까지 키운, 수억마리는 족히 될 예쁜꼬마선충은 거의 모두 그가 만들어낸 젤리 집에서 태어났고 그 안에서 자란 뒤 생을 마감했다. 선충이 먹고 자랄 집과 먹이가 끊임없이 제공된 덕분에 나도 마음 편히 연구를 고안할 수 있었고, 이를 구체화해 좋은 연구로 길러낼 수 있었으며, 결국에는 그 성과를 세상에 내놓을 수 있었다. 혼자 감당하기엔 어려운 이 고된 노동을 누군가 함께 해줬기 때문에 좋은 연구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적어도 내가 아는 생물학 연구실 중 상당수에서는 여성이 이런 일을 담당했다. 그리고 사회에서 여성이 담당하는 수많은 노동처럼, 이들의 역할은 연구실 밖에서 크게 주목받지 못한다. 비정규직으로서 담당하는 이들의 역할은 대개 연구 성과에서는 드러나지 않으며, 때로 단순하고 당연한 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의 노동이 없다면 좋은 연구는 시작되기 어렵다. 생각을 구체화하고 구현하려면 그에 필요한 노동을 반드시 해야만 하고, 혼자서는 결코 할 수 없을 많은 일을 해내야 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진행되는 연구가 더 발전할 수 있으려면, 이와 같은 노동에 지금보다 더 높은 가치를 부여하고 더 많은 전문가가 자리 잡을 수 있도록 해야 하지 않을까.

오는 3월8일은 세계 여성의 날이다. 빵과 장미로 대표되는 노동환경 개선과 투표권 쟁취를 목표로 시작된 100여년 전 행사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성별에 관계없이 먹고살기 힘든 게 현실이지만, 그렇다 해도 여전히 한국 여성의 근속연수는 남성 근속연수보다 30%가량 짧고 임금도 30%가량 적다. 게다가 대선 정국 속에서조차 여성을 향한 차별적 발언이 잇따르고 있지 않던가. 그러니 다시 한번, 계속해서 외칠 수밖에 없다. 여성이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빵과 장미를 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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