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우리 | 기후변화팀장
일상의 고단함을 잊기 위한 저마다의 ‘진통제’가 있다. 친구는 한동안 회사로 자신의 택배를 보냈다고 했다. 점점 회사 가기 싫어지는 마음을 기다리던 택배를 받으러 가야 한다는 마음으로 덮어 또 출근한다는 말이 참 안타까웠다.
나의 경우 빨리 연말 분위기를 느끼고 싶어 11월이 되면 거실에 크리스마스트리를 설치한다. 불 꺼진 어두운 거실에서 가만히 깜박거리는 조명을 보다 보면 몸 안에 배터리라도 있는 듯 잠시 충전이 되는 것 같다. 한해 동안 팽팽하게 당겨온 활시위를 잠시 내려놓고 나 자신과 주위를 둘러보며 쉬어 가도 된다고 허락받은 기분이다.
겨울에만 만날 수 있는 눈은 현실의 시름을 잠시 잊게 해주는 자연의 대표 선물이다. 구름 속 수분이 얼어 내리는 모든 것을 눈이라고 하지만, 수증기가 함유된 정도에 따라 이름이 달라진다. 포슬포슬 가벼운 함박눈, 얼음 결정을 품고 있어 더 얼면 우박이 되는 싸라기눈, 말 그대로 가루처럼 날리는 가루눈 등으로 다르게 부른다. ‘뽀드득’ 눈 밟는 소리도 날씨에 따라 달라진다. 내린 눈이 얼어붙었다면 마찰음이 크게 들리기 때문에 뽀드득 소리가 크게 들릴수록 날씨가 추워진다는 걸 예상해볼 수 있다.
특히 눈은 만들어지는 구름 속 환경에 따라 눈 결정체 모양이 다 달리 생기기 때문에 더욱 신비롭다. 하나의 우주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자기 자신만의 특별함을 가진 것처럼 눈도 저마다의 사연을 품은 것 같다.
사계절 중 가장 건조한 한국의 겨울, 눈은 이래저래 도움이 된다. ‘눈 이불을 덮으면 보리 풍년이 든다’는 속담이 있다. 처음 이 속담을 들었을 때, 겨울철 환기가 부족한 아파트 좁은 베란다 텃밭에서 과도한 관심(물주기)으로 여러 ‘반려 식물’을 떠나보낸 초보 식물 집사는 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눈 녹은 물이 땅속에 스며들어 대지를 적셔 봄철 가뭄 부담을 덜어준다. 길에서 염분 섭취를 많이 하기 때문에 늘 수분 공급이 중요한 길고양이들에게도 목을 축이는 생명수다. 가을철 파종이 끝난 보리의 싹 위로 눈이 이불처럼 덮여 있으면 찬 바람을 막아주고 땅의 온기가 흩어지는 것을 막아준다.
겨울·봄 가뭄이 심해지면서 식물 생장에 영향을 준다는 ‘상식’이 뉴스로 전해진 지 수년째다. 그중 구상나무가 말라 죽고 있다는 소식은 매년 업데이트 중인 ‘단골’ 기후변화 뉴스다. 구상나무는 한라산, 지리산 등 해발고도 1500m가량인 아고산대에 서식하는 한국 고유종이다. 모든 지역의 구상나무 고사를 일반화할 수 없기에 추가 연구가 필요하다는 반론이 있지만, 기후변화가 심해지면서 겨울과 봄으로 이어지는 고산지대의 수분 부족이 구상나무를 고사시키고 있다는 연구가 주목받고 있다.
특히 구상나무는 외국에서 크리스마스트리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1920년 영국 출신 식물학자 어니스트 윌슨이 제주에서 최초 발견해 한국 특산종으로 이름을 붙인 구상나무가 외국으로 건너가 신품종이 개발되며 크리스마스트리로 활용되고 있다. 식물학계에서는 만약 품종 보호를 통해 종자 사용에 대한 비용을 청구했다면 그 비용이 엄청났을 것이라며, 시민들이 생물 다양성 문제에 관심을 좀 더 가져주면 좋겠다고 아쉬워한다.
19일 오전 서울의 한 도로에 전날에 이어 다시 또 눈이 내리고 있다. 연합뉴스
한해 동안 환경·기후변화 기사에 관심을 가진 독자들이 점점 늘고 있다고 체감했다. 작은 손으로 환경을 생각하며 기후일기를 쓰는 어린이들부터, 기후변화 문제를 고민하는 시민들은 이웃과 사회의 미래를 고민하는 착한 시민들일 가능성이 높다. 착한 이들에게 더욱 힘들었을 또 한해가 지나간다. ‘눈이 내리는 날에 빨래를 한다’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함박눈이 오면 많이 춥지 않고 포근하다. 하늘이 주는 진통제인 함박눈을 맞으며 또 하루를 버틸 힘을 충전할 수 있었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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