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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만원짜리 밤을 꿈꾸며

등록 2021-12-16 19:00수정 2021-12-17 02:32

[사사로운 사전] 원도 | 작가·경찰관

세상 사는 게 1층에서부터 만원이었던 엘리베이터에 발 디디는 일의 연속이다. 내가 서 있는 층에서 딱 한번 열린 틈바구니를 겨우 비집고 무게를 실어 발걸음을 내딛는 순간 외부인을 내쫓을 요량인지 위협적으로 내부가 만원임을 알리는 경고음이 울린다. 이미 한 자리씩 차지한 채 올라갈 일만 기다리고 있던 이들의 따가운 시선이 나에게 쏟아지고 나는 허겁지겁 왔던 길을 되돌아간다. 뒤통수와 목 언저리가 뜨끈해진다. 후끈 달아오른 나의 뒤로 엘리베이터는 매끄러운 마찰음을 내며 올라가고 나는 다시 내 차례를 기다린다. 언제 기회가 돌아올지 그 무엇도 기약할 수 없는 채로. 이 연속극은 언제 완결을 맞이할까.

과거 <만원의 행복>이라는 이름의 예능 프로그램이 있었다. 연예인이 단돈 만원으로 일주일을 버티는 게 주된 내용이었는데 2021년인 지금 만원으로 얻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행복을 떠올려보자니 편의점에서 판매하는 4캔 만원짜리 맥주뿐이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4캔입 맥주가 곧 1만1천원으로 인상된다는 뉴스를 보았고 그날 2만원어치를 사 왔다. 우리 집 냉장고는 이미 다른 맥주들로 만원이었지만.

책장에 오래도록 꽂혀 낡아가던 책을 한아름 정리해 고물상에 팔았다. 서른권이 넘는 양이었는데 천원이 조금 넘는 돈을 손에 쥘 수 있을 뿐이었다. 무게가 나가는 책의 값어치가 이러한데 얇디얇은 낱장의 폐지로 만원을 채우려면 리어카의 바퀴가 몇번이나 돌아가야 할까. 투입된 노동력에 비례하는 몫을 벌 수 있는 세상이 아닌 건 진즉 알고 있었지만 참 그랬다.

엄마의 장롱은 케케묵은 이불들로 반평생 만원이었다. 이건 시집올 때 맞춘 것, 저건 딸이 취업 기념으로 사준 것, 그건 돌아가신 할머니가 남기신 것. 독하게도 엮인 추억들이라 도무지 버릴 수 없었던 세월들. 과거로 가득한 엄마의 장롱엔 새로운 기쁨이 들어갈 자리가 없다. 매 계절 달리 덮는 이불이지만 결국은 매 계절 반복되는 추억을 곱씹으며 늙어갈 뿐이었다. 추억은 삭지도 않는다.

변사자의 사망 소식을 듣고 부리나케 찾아온 유족들로 만원이라 사진 촬영조차 쉽지 않은 현장이 있는가 하면, 변사자의 가계 살림을 모두 합해도 단돈 만원의 값어치조차 나올 것 같지 않은 휑한 현장도 있다. 저마다 이름을 갖고 태어났지만 누구는 수없이 기억되고 누구는 무연고로 행정처리된다. 화장되지 않고 떠도는 이름은 그를 기억해주는 이에 의해 불릴 때 비로소 긴 여행을 끝마칠 것이다.

밤을 꼬박 새우는 당직 근무를 하고 나면 심장이 빨리 뛰는 게 느껴진다. 기분 좋은 두근거림보다는 면접 대기장에서 호명되는 순간만을 기다린 채 잔뜩 굳어 있는 딱딱한 긴장감에 가까운 느낌이다. 경찰관의 야간 수당은 한시간에 3천원 남짓이다. 계급별로 차이가 있지만 많아봐야 4천원대다. 나는 계급이 낮으니까 어쩔 수 없이 3천원대인데… 네시간의 야간 근무를 버텨야만 4캔에 만원짜리 맥주를 살 수 있는 셈이다. 맥주 한캔과 한시간의 밤을 맞바꾸는 게 가혹한 계산식 같아도 이 정도면 꽤 남는 장사 아닌가 싶어지는, 가슴 답답한 밤이 이어진다.

시골에서 발생한 절도 현장 감식을 마친 어느 새벽. 핸들 열선조차 없는 과학수사 차량에 장비를 싣다 바라본 밤하늘은 제자리를 차지한 별들로 만원이었다. 북두칠성 별자리를 두 눈으로 처음 보았다. 주변이 어두워야만 확실히 보이는 별자리의 운명은 비극인가 낭만인가. 북두칠성을 안주 삼아 바라보며 맥주를 마신다면 한도 끝도 없이 들어갈 것 같았다. 꼬박 일주일의 밤과 맞바꾼 맥주를 마셔댄대도 취하지 않을 듯한 밤공기를 낡은 관용차로 가르며 돌아오는 길에 요소수를 2만원어치 충전했다. 그래도 밤이 끝나지 않았다. 맥주와 맞바꿀 나의 밤은 아직 한참이고 남아 있을 모양이다. 핸들을 잡은 손가락이 아찔하게 차갑다. 조금 더 수월하게 운전하기 위해선 만원짜리 장갑을 사야 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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