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리카노 나오셨습니다.” 커피전문점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과잉 존댓말이다. 영어권에서는 이와 달리 ‘가짜 친근감’을 강조하는 표현으로 친절을 표시하곤 한다.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로버트 파우저 | 언어학자
연말이 가까워오면서 마음이 좀 바빠졌다. 소식이 뜸했던 이들과 이메일과 문자, 에스엔에스(SNS) 등을 통해 집중적으로 안부를 나눴다. 그러다 문득, 사용하는 인사말이 사뭇 달라진 걸 깨달았다.
보통 영어로 주고받는 이메일 첫머리는 ‘Dear’로 시작했다. 최근에는 대부분 ‘Hi’로 시작한다. 마무리에 자동으로 붙었던 ‘Sincerely’도 거의 사라지고, ‘Best wishes’를 줄여서 쓴 ‘Best’가 그 자리를 채우고 있다. 많은 이가 쓰고 있으니 따라 쓰긴 하지만, 어색하지 않은 건 아니다.
일상생활에서도 변화는 예외가 아니다. 가게에 가면 나를 ‘Sir’ 대신 ‘Boss’ 또는 ‘Buddy’로 지칭한다. 친근감을 드러내는 것일 텐데 처음에는 낯설기도 하고 무례하게도 느껴졌다. 지금은 자주 듣다 보니 별 감흥도 없다.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How are you?” 대신 훨씬 친근한 느낌의 “How’s it goin’?”을 더 많이 쓴다. 한국의 대부분 교과서에는 “Thank you”라고 하면 “You’re welcome”이라고 답한다고 가르치지만, 이 역시 사용 빈도가 줄어들고 있다. 대신 ‘No problem’ 또는 ‘No worries’라고 답한다.
이런 변화의 원인으로는 다양한 언어권과의 문화 교류, 이민자 증가 등이 지목되곤 한다. 물론 그런 영향도 없지는 않겠지만, 영어권의 경우는 미국식 영어가 패권을 쥐고 있으니 다른 나라 영어의 영향을 받을 가능성은 썩 높지 않다. 또한 최근에는 영국이나 오스트레일리아 등 다른 나라에서 미국으로 이민 오는 이들이 줄었으니 그 영향이라고 하기도 어려워 보인다.
그렇다면 뭘까? 가장 설득력 있는 설명은 역시 세대 변화다. 1980년대 이후 태어난 세대들은 기성세대의 인사말을 지루하고 딱딱하다고 여겼고, 점차 친근감 있는 말이나 표현을 찾아 쓰기 시작했다. 이러한 변화는 그들이 좋아하는 대중문화로부터 비롯한 경우가 많다. 어떤 말이나 표현이 새롭다고 느껴지면, 에스엔에스를 통해 즉각 확산되고, 이를 통해 쉽게 정착한다.
기성세대와 차별화를 꿈꾼 것은 비단 요즘 젊은 세대만의 일은 아니다. 오늘날의 기성세대 역시 젊은 세대였던 시절, 새로운 말과 표현을 만들어 사용했다. 1980년대에도 그랬다. 그 무렵 미국의 경제적 기반은 제조업에서 서비스업으로 급격히 전환되었다. 서비스업으로의 변화가 가속화되면서 경쟁 역시 치열해졌고, 더 좋은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생존의 바탕이 되었다. ‘좋은 서비스’의 개념이 확산, 정착되면서 언어에도 그런 변화가 반영되기 시작했다.
‘좋은 서비스’를 반영한 언어란 어떤 것일까? 친절은 기본이지만 그 적용은 사뭇 다르다. 제조업이 주류였던 시대엔 화이트칼라는 전문직, 블루칼라는 노동자였고, 전문직들의 구매력이 우위를 차지했다. 당연히 화이트칼라는 상류층으로 대우를 받았고, 이들은 노동자들과는 차별화된 대우를 받고 싶어 했다. 이런 이들에게 ‘Sir’ 같은 존칭은 친절의 상징이었다.
하지만 서비스업이 주류가 된 뒤로 미국에서는 누구나 동일한 고객이 되었다. 존칭을 통한 구분이 불필요해지면서 오히려 형식적인 존칭은 딱딱하게 들리고, 거리감을 느끼게 하기 때문에 거꾸로 불친절하게 여겨지기까지 했다. 권위적인 존칭 대신 친근감 있는 표현이 더 편하고 친절하게 받아들여진다. 여기에서의 친근감은 물론 가짜지만, 그래도 누구도 개의치 않는다.
한국은 어떨까. 역시 2000년대로 접어들면서 서비스 경쟁은 치열해졌다. 그러면서 ‘좋은 서비스’에 대한 개념도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한국어의 변화 양상은 영어와는 정반대다. 오히려 존댓말의 과잉이 눈에 띄게 늘어났다. 병원에 가면 “감기가 오셨네요”라고 하고, 카페에 가도 “아메리카노 나오셨습니다”라고 한다. 처음에는 한두 군데서 들리던 과잉 존댓말이 이제는 매너리즘에 빠진 것처럼, 어디에서나 흔히 들릴 만큼 정착되었다.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이제는 말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그러려니 할 정도다.
‘좋은 서비스’의 기본은 친절이라고 앞에서도 말했다. 하지만 이런 친절의 양상이 영어에서는 가짜 친근감으로, 한국어에서는 매너리즘에 빠진 존댓말로 드러나는 건 흥미롭다. 서로 정반대이긴 하지만, 둘 다 똑같이 상업적인 친절이라는 건 동일하다. 이런 가짜 친절은 앞으로 우리가 쓰는 말을 어떻게 변화시킬까? 다른 건 몰라도 서비스업의 경쟁이 더 치열해지는 한 어떤 식으로든 계속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건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