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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엄지가 데뷔하는 날

등록 2021-11-11 18:30수정 2021-11-12 02:33

[사사로운 사전] 원도|작가·경찰관

누구에게나 아프진 않아도 감추고 싶은 손가락이 하나쯤은 있다.

나는 엄지손가락이 못생겼다. 아니지. 손가락이 아니라 손톱이다. 사실 못생겼다는 기준은 주관적인 느낌일 뿐 객관적인 지표는 될 수 없으니 못생겼다는 표현은 잘못된 듯하다. 이 정도로 표현할 수 있겠다. 나의 엄지손톱은 조금 색다르게 생겼다. 보통의 손톱은 세로로 긴 직사각형 형태인 반면 나의 엄지손톱은 가로로 긴 직사각형 형태다. 엄지손가락 자체의 길이도 눈에 띄게 짧다. 나와 같은 유의 손톱을 흔히 우렁손톱 혹은 개구리손톱이라고 부른다지만 나는 스스로를 그렇게 불러본 적이 단 한번도 없다. 듣기만 했을 뿐. 나에게 그런 표현을 사용하며 엄지손톱을 지칭했던 이들은 모두 격앙된 어조였던 것도 기억난다.

언젠가부터 엄지손가락을 손바닥 안으로 집어넣은 채 주먹을 말아 쥐고 다녔다. 사진을 찍을 때 습관처럼 짓게 되는 브이 포즈도 약지로 엄지손톱을 가리는 모양으로 익혔고 펜을 쥐는 방법도 검지를 엄지 위에 엎어 최대한 엄지손톱이 보이지 않는 방향으로 터득했다. 그래서 글을 조금만 써도 펜이 손가락을 파고드는 고통을 느낀다. 쓰기 위한 목적보다는 손톱을 가리기 위한 목적에 맞춰 펜을 쥐는 방법을 익힌 탓에 자세가 엉망이기 때문이다. 젓가락질도 마찬가지다. 나는 젓가락질을 참 이상하게 하는데 역시나 엄지를 최대한 남에게 덜 노출하기 위한 방향에 맞춰 스스로 터득한 자세다. 그래서 끝부분으로 갈수록 뭉툭해지는 형태의 쇠젓가락은 제대로 쓰지 못한다. 간혹 중요한 식사 자리에서 그런 젓가락이 나오면 곤혹스럽다. 내 젓가락질은 그런 형태의 젓가락에는 적합하지 않아서 반찬 하나조차 힘을 주어 잡을 수 없기 때문에 음식을 집는 동안 줄줄 흘리는 일이 다반사다. 행여나 그런 일이 발생할 경우 최대한 젓가락질을 삼가고 국과 밥만으로 식사를 해결하곤 했다. 결국, 엄지는 또다른 엄지를 낳을 뿐이었다.

사회생활을 매일 수행하면서 다양한 억압과 간섭도 수반되었다. 하다못해 1센티도 되지 않는 손톱의 길이까지도 예외는 아니었다. 보통의 무리와 조금이라도 다른 점을 동물적인 감각으로 찾아내던 청소년 시절에 나의 엄지는 숨길 수밖에 없는 것이었으나 지금은 어떨까. 의지만 있다면 이까짓 엄지손톱의 모양 따위, 사람이 죽고 사는 문제와 전혀 관련 없는 나의 엄지는 세상 속으로 화려하게 데뷔할 수 있을까. 아직까지도 나의 엄지는 뒤로 물러서는 데 익숙한 존재다. 선물받은 영양제나 기념하고 싶은 입장권을 한 손에 들고 다른 손으로 사진을 찍을 땐 엄지가 사진에 나오지 않았나 검수하는가 하면, 사진을 찍히는 입장일 땐 환한 웃음 뒤로 엄지를 감추기 바쁘다. 그래서인지 타인을 볼 때면 항상 손을 먼저 본다. 같은 형태의 엄지인을 만나면 애틋한 동지애까지 느낀다. 엄지는 나에게 있어 내면의 아픔과 같아서, 엄지를 가진 이는 같은 엄지를 알아본다.

엄지는 ‘엄지가락’으로도 불리는데 엄지가락은 엄지손가락이나 엄지발가락을 통틀어 이르는 말인 동시에 중요한 지위에 있는 사람이나, 사물의 기본이 되는 핵심적 부분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엄마는 내가 엄지손톱에 대해 불평할 때마다 그렇게 생긴 엄지를 가진 사람이 손재주가 많고 돈을 잘 버는 팔자라고 하신다. 그렇다면 나의 핵심적인 부분은 엄지손톱인가, 손재주가 많고 언젠가는 돈도 잘 버는 사람이 되는 건가. 정의는 내리기 나름이니까 후자를 선택하기로 했다. 그게 20년 이상을 숨기고 살았던 엄지에 대한 작은 속죄일 테다.

얼마 남지 않은 올해의 목표는 젓가락질 교정으로 정했다. 책상 위에 나무젓가락을 올려놓고 틈틈이 연습 중인데 쉽지 않고, 놀랍게도 쑥스러운 기분이 든다. 지금껏 엄지를 내보이는 것이야말로 나에겐 모든 것을 보여준다는 의미였다. 감추기만 해서는 또다른 엄지를 낳을 뿐임을 충분히 알았으니 이제는 밖으로 나가 데뷔할 차례다, 나의 엄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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