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이’들에게 왜 투표하러 가지 않느냐고 물어보면, 내가 투표해봤자 아무것도 바뀌지 않기 때문이라고 대답하는 것이 보통이다.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고 왜 그토록 굳은 확집을 갖고 있을까. 어른들은 꾸짖거나 가르치면서 그 태도를 바꾸게 하려 한다. 하지만 그들은 더 깊은 허무 속에, 그것이 허무라는 사실조차 알지 못한 채 살아간다.
서경식|도쿄경제대 명예교수, 번역 한승동(독서인)
오늘은 10월30일이다. 일본에서는 내일이 중의원 선거 투표일. 그 결과를 보고 썼으면 좋겠지만, 정해진 일정상 어쩔 수 없이 지금 쓴다.
이번 선거는 2012년 12월 이래 이어져온 제2차 아베 신조 정권과 그 후계 스가 요시히데 정권의 약 9년에 걸친 집권에 대해 주권자가 심판을 내릴 기회다. 장기 정권에 따른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은폐하는 정치를 바꿀 기회인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일본 국적자가 아니기 때문에 투표권이 없어, 이 중요한 기회에 내 의사를 투표로 표현할 수가 없다. 그런 내 처지에서 볼 때 투표권을 지닌 일본 국민 다수가 주권자로서의 권리를 자각하지 못해 늘 투표율이 저조했던 것은 참으로 안타깝고 이해하기도 어렵다.
내일의 투표 결과가 어떻게 될까. 매스컴 각 사의 사전 예측으로는 자민·공명 연립여당이 고전해서 의석수가 어느 정도 줄어들겠지만, 정권교체에 이를 정도로 극적인 의석 감소는 일어나지 않을 것 같다. 또 만일 집권여당에 그런 위기가 닥치더라도 유사 야당이라고 해야 할 포퓰리스트 정당과의 연립을 통해 그 위기를 빠져나갈 것으로 본다. 그럴 경우 유럽 등 세계 각지에서 확산되고 있는 극우정당의 진출이라는 현상으로 이어질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반길 일이 아니다.
투표율을 올리기 위해 ‘젊은이’ 대상의 계몽운동이 벌어졌다. 그러나 이는 문제의 본질에서 벗어난 대책이다. 중요한 것은 정치의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을 ‘나의 일’로 느끼는 감성, 달리 말하면 내가 이 나라의 정치를 좌우하는 ‘주권자’라는 자각이다. 그것은 마치 교통법규처럼, 다른 사람들로부터 가르침을 받을 일은 아니다.
‘젊은이’만이 아니라 이 나라의 사람들 대다수는 그런 자율적 ‘주권자’가 되는 데에 이미 오랜 세월 동안 실패해왔다. 정해진 틀, 주어진 조건 속에서 자신이 어떻게든 무난하게 지나가는 데에는 민감하지만, 그런 틀 자체의 타당성이나 정당성을 근본적으로 문제 삼지는 않는다. 정부나 대기업 등 ‘위쪽’이 ‘국가 프로젝트’라는 말만 해도 쉽게 사고정지 상태가 돼 거기에 따라간다. 근본적인 문제 제기를 하는 사람은 답 없는 난제에 집착하는 말썽꾼으로 무시당하거나 배제당한다. 도쿄올림픽이 바로 그러했다.
찜찜한 기분으로 잡지 <세카이> 최근호(2021년 11월호) 책장을 넘기고 있다가 ‘해결’책은 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힌트’가 될 만한 말과 마주쳤다. 하나는 사카이 다카시의 논고 ‘반(反)평등이라는 상념’에 소개돼 있다. 이에 따르면, 인류학자 데이비드 그레이버는 “네오리버럴리즘(신자유주의)의 최우선 과제”가 “지금의 세계와는 다른 가능성을 모색하는 모든 상상력을 봉쇄하는 데에 있다”고 지적했다.(<더 유토피아 오브 룰스>(The Utopia of Rules)) “네오리버럴리즘은 경제적으로 실패했고, 약속을 거의 이행하지 않았다. 나아가 주장했던 이념을 스스로 노골적으로 배반했다. (중략) 그럼에도 변함없이 살아남았을 뿐만 아니라 실패하면 할수록 더 강력해지고 더 강압적으로 그 실패한 시책을 밀어붙이려고 한다. 이런 좀비화가 왜 가능한가? 그것은 네오리버럴리즘이 다른 세계의 가능성, 다른 세계로 향하는 상상력을 가로막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정말 맞는 얘기다. ‘젊은이’들에게 왜 투표하러 가지 않느냐고 물어보면, 내가 투표해봤자 아무것도 바뀌지 않기 때문이라고 대답하는 것이 보통이다.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고 왜 그토록 굳은 확집을 갖고 있을까. 어른들은 꾸짖거나 가르치면서 그 태도를 바꾸게 하려 한다. 하지만 그들은 더 깊은 허무 속에, 그것이 허무라는 사실조차 알지 못한 채 살아간다. ‘이 세계와는 다른 세계가 있다’ ‘이 세계는 바뀔 수 있다’는 상상을 처음부터 박탈당한 것이다. 그 허무는 그들 세대에서 시작된 것은 아니다. 그들의 부모도, 그보다 더 위의 세대도 이미 ‘주권자 의식’을 잃어버리고 있었다.
10년쯤 전에 내 강의를 듣던 학생이 ‘픽션화’라는 말을 가르쳐주었다. 그에 따르면 그들은 모든 것을 ‘픽션화’해서 본다는 것이었다. 대학 강의를 살아 있는 교수와 마주보며 그 내용을 고찰하는 것이 아니라 ‘강의 장면’이라는 픽션으로 받아들인다. 친구들과의 교우나 연인과의 연애도 마찬가지다. 교수도 친구도 연인도 디스플레이상의 영상이고, 잘못되면 언제라도 스위치를 끌 수 있는 대상인 것이다. 모든 것이 ‘픽션화’돼 있는 이상 그 때문에 상처 입을 걱정도 없다. 최악의 경우 ‘이건 픽션이야’ 하고 스스로를 타이르면서 타인에게 상처를 주거나 죽일 수도 있다. ‘지금 살고 있는 이 세계’가 픽션인 이상 이미 ‘다른 세계’를 현실적인 것으로서 상상하는 것은 의미가 없어진다. 이런 경향은 힘이 없어진 사람들의 일종의 방어기제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급속한 정보통신(IT)화가 이런 추세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상상력의 바탕에 있어야 할 삶의 현실감을 박탈당하고 있는 것이다.
같은 잡지에 실린 우카이 사토시의 논고 ‘붕괴 스펙터클, 도쿄올림픽 2020’에는 미국의 사회학자로 올림픽 선수였던 줄스 보이코프가 제창한 ‘축하 자본주의’(celebration capitalism)라는 개념이 소개돼 있다. 그 속성은 ‘축제’를 구실로 비상사태적 상황을 인위적으로 조성해 통상적인 법 운용이나 인권규범을 경시 내지 정지시키는 “일방적인 관·민 협조를 통해 민간자본이 일반적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조건으로 공적인 자산·자금을 수탈할 수 있게 하는” “안보산업과 특히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그에 따라) 최첨단 감시기술의 사회 침투가 일거에 진행된다”…. 더 있지만 지면 사정상 이 정도로 줄인다.
어쨌든 이런 속성을 갖춘 ‘축하 자본주의’의 모습은 올여름 도쿄에서 그 진면목을 드러냈다. 일본 국민 다수는 코로나바이러스 사태의 위협 속에서 요구받는 대로 ‘축하’하고 대량으로 만들어져 유포된 ‘미담’에 ‘감동’했다. 그 뒤에는 거대한 적자가 남았으나 그 부담은 앞으로 올림픽을 강행 개최한 정치가나 기업이 아니라 국민이 짊어져야 할 것이다. 이것은 올림픽에 한정된 얘기가 아니다. 픽션화되고, 엔터테인먼트화된 세계에서 널리 일반화된, 가장 효율적인 착취 방법일 것이다. ‘축하 자본주의’에 맛을 들인 정부나 기업은 차례차례 축하 이벤트를 계속 벌여나간다. 그 뒤처리는 그들이 알 바 아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것은 이런 세상이다. 이번 선거는 이런 나의 생각을 바꿀 만한 결과가 될 수 있을까? 내년의 한국 대통령 선거는 어떻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