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 미국 워싱턴의 국회의사당을 점거한 시위가 발생했다. 시위대는 “트럼프 지지자” 및 “폭도”로 불리었다. 그리고 이들은 “공화당 지지자들”과 동일시된다. 당시 <워싱턴 포스트> 등 진보 언론에선 “공화당 엘리트들”을 비판하는 칼럼 등을 실었다. 워싱턴/AP 연합뉴스
로버트 파우저 | 언어학자
“강남 좌파를 영어로 어떻게 번역해?”
2019년 한국 친구가 내게 물었다. 그 무렵 한국 뉴스에 매일 나오던 단어다. ‘좌파’는 쉽지만 ‘강남’은 어렵다. ‘Gangnam’이라고 해도 되지만, 그랬다가는 한국의 정치적 상황이 아닌 싸이의 ‘강남 스타일’(Gangnam Style)을 먼저 떠올릴 것이다. 마땅한 답이 떠오르지 않아 잘 모르겠다고 답하고, 화제를 돌렸다.
‘코로나19’를 겪느라 2019년이 먼 옛날 같지만, 최근 미국 정치 상황을 보면서 ‘강남 좌파’를 자주 떠올린다. 정치적 입장이 아닌 사회언어학적 현상으로서다. 2021년은 21세기 들어와 어느덧 세 번째 10년이 시작되는 해다. 그래서인지 20세기에 태어나 자란 우리 세대 용어로는 오늘날의 사회를 정확하게 설명하기가 어렵다. 예를 들어 ‘상류층’, ‘중산층’, ‘노동자 계층’, ‘저소득층’ 같은 용어는 내게 익숙하지만, 이런 고전적 용어는 오늘날 정확히 누구를 지칭하는지 설명이 어렵다. 반면 사회 변화에 따라 다양한 계층이 등장했지만 이를 설명하는 말이 만들어지지 않아 애매모호한 용어를 쓰기도 한다. 요즘 미국 언론에서 유행처럼 사용하는 ‘엘리트들’, ‘공화당 지지자’, ‘유색인’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엘리트들’(elites)은 보수 언론에서 주로 사용하는데 사회학의 ‘엘리트’(elite)가 아니라 희한하게도 복수형이다. 경제 구조가 제조업에서 지식 산업으로 이동하면서 나타난 전문직 분야의 다양화를 반영한다. 전문직은 주로 대학원 이상 고학력자에, 전문성에 따라 보수도 높다. 여론조사에 따르면 대학원 졸업 이상의 고학력 전문직은 압도적으로 보수 정치를 거부하고, 민주당을 지지한다.
반면 ‘공화당 지지자’(Republicans)는 진보 언론 기사에서 자주 만날 수 있다. 원래는 전통적으로 공화당을 지지하는 사람을 지칭했지만, 최근에는 조금 더 확대해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을 지지하고 나아가 고학력 전문직들의 가치관을 거부하는 사람들까지 포함한다. ‘공화당 지지자’ 중에는 전통적인 공화당 지지자 말고도 지금까지 정치에 전혀 관심이 없던 이들도 많다. 이 용어를 들으면 대도시보다는 소도시, 농촌 지역에 사는 백인들이 연상된다.
그리고 ‘유색인’(people of color)이 있다. 이 말의 유행 전까지만 해도 피부색에 따라 각각의 용어를 쓰는 게 일반적이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백인이 아닌 모든 사람을 ‘유색인’으로 통칭하기 시작했다. 이런 용어의 등장은 백인이 사회적 주류라는 인식과 특권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에 백인이 아닌 이들에게는 달갑지 않다. 역설적으로 이에 대한 관심이 있는 주류 매체와 진보 언론사 기사에서 자주 등장한다.
‘엘리트들’, ‘공화당 지지자’, ‘유색인’의 가장 큰 문제는 정치적 선동을 목적으로 ‘우리’가 아닌 타자를 지목해 사회적 갈등을 부추긴다는 점이다. 코로나19로 비상 상황임에도 보수 언론은 ‘코로나19 확산보다 마스크와 사회적 거리두기에 협조하는 ‘엘리트들’이 더 문제라는 식의 내용을 기사에 끼워 넣곤 했다. 이들은 또한 백인이 아닌 이들의 입장 같은 건 관심조차 두지 않는다. 이에 비해 진보 언론은 ‘공화당 지지자’에 관한 보도에서 객관성을 잃은 우월한 인식을 은연중에 드러내곤 한다. ‘유색인’에 관한 기사가 많긴 하지만, 그 안에 담긴 다양성을 고려하지 않은 무신경한 태도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용어의 등장과 사용은 어디서나 표를 구하는 데 열심인 정치인들 책임이 크다. 하지만 언론이 그 책임으로부터 과연 자유로울까? 민주 사회에서 언론의 역할은 정치 집단과 손을 잡고 시민을 선동하는 것이 아니라 객관적 보도를 통해 함께 사는 사회에 대한 시민들의 이해를 돕는 것이다. 그래야만 시민은 언론을 통해 사회를 이해하고, 정치인과 권력자들의 행동에 온당한 책임을 물을 수 있다. 이를 통해 민주주의 토대가 견고해지는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과연 오늘의 언론이 그런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다고 여기는 시민들이 얼마나 될까.
오늘날 미국의 사회적 갈등은 염려스럽고 앞날이 걱정된다. 그러나 걱정만 한다고 해결될 일은 없다. 언젠가 한국 친구 중 누군가 내게 또다시 ‘강남 좌파’의 영어식 표현을 묻는다면 나는 이제 이렇게 답할 것이다.
“정치인들이나 그들을 돕는 언론으로부터 이용당하지 않도록 그런 말은 아예 쓰지 않는 게 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