곁다리가 결정적일 때가 많다. ‘3개 천원’보다 ‘2개 천원인데 1개 더 줌’이 탐심을 더 자극한다. 차의 기본 성능보다 선팅, 블랙박스를 얼마나 좋은 걸로 끼워주느냐로 차를 살지 말지 정한다. 자주 가는 식당 주인장은 뭘 시켜도 서비스로 두부볶음을 내온다. 단골이 안 될 도리가 없다.
수식어는 ‘서비스 상품’ 같은 존재다. 크게 중요하지 않아 허투루 넘기는데, 판단에 상당한 영향력을 미친다. 수식어의 의미는 수식 받는 말에 기대어 천방지축 뒤바뀐다. ‘좋은 아버지’, ‘좋은 차’, ‘좋은 책’을 생각해보라. 각각 무엇이 ‘좋은가?’에 대한 판단은 ‘아버지, 차, 책’이 갖는 특성이나 우리의 경험이 결부된다. 좋은 아버지는 좋은 차와 다르다. ‘쌩쌩 잘 달리고, 연비 좋고(?), 부딪쳐도 안전한(푹신푹신한?)’ 아버지가 좋은 아버지일 리 없다.
수식어가 무서운 건 말하는 사람이 대상을 어떻게 이해하고 규정하는지가 수식어에 담기기 때문이다. 수식어는 대상을 한정하고 분류한다. 수식어 때문에 본심과 밑바닥이 드러난다. ‘착한 소비’가 우리의 소비를 착한 것과 착하지 않은 것으로 나누듯, ‘건강한 페미니즘’도 페미니즘을 건강한 것과 건강하지 않은 것으로 나눈다. ‘건강한’ 페미니즘이란 ‘건전한(?), 온건한, 무해한, 전복적이지 않은, 불온하지 않은, 고분고분한’ 페미니즘이겠지.
수식어를 빼고 말하는 게 대인배의 풍모다. ‘페미니즘이 남녀 간의 건전한 교제를 막는다!’ 얼마나 많은 토론거리를 던져주는 주제인가. 아차차, 수식어를 더 빼야겠군. ‘페미니즘이 교제를 막는다.’
김진해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