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중구의 한 건물에 에어컨 실외기가 빼곡히 설치돼 있는 모습. 연합뉴스
최우리 ㅣ 디지털콘텐츠부 기후변화팀장
“엄마는 어릴 때 더우면 뭐 했어?”
“계곡에서 멱 감고 원두막 가서 쉬고 그랬지. 그늘에 앉아 가만히 있으면 바람이 솔솔 불어와. 부채질하면 좀 낫고. 그런데 그땐 요즘처럼 안 더웠어.”
대화는 여기서 멈췄다. 에어컨이 없는 거실에 앉아 선풍기가 내뿜는 더운 바람을 쐬며 인고의 시간을 보내던 분가한 딸은 더 할 말이 없다. 생각해보니 몇년 전까지만 해도 거리에서 나눠주는 홍보물 중에 부채가 많았다. 이제는 인기가 없는지 부채 홍보물도 많이 사라졌다. 유튜브로 지하철에 에어컨이 없던 20세기 후반 뉴스를 보니, 방송 기자는 역사 안이 찜통이라며 36도를 가리키는 온도계를 보여준다. 지금은 외부 공기가 40도에 가깝다. 32도 정도에 가장 활발히 활동하는 모기도 사라졌다. 이른 아침 수도꼭지를 틀어도 수일째 물이 뜨끈하다. 숲으로 우거진 마당에 악어가 돌아다니는 미국 플로리다 올랜도의 숙소에 머물 때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
“많이 더우면 너희 데리고 은행에 갔던 것 같네.”
에어컨이 생활필수품이 아닌 고급 가전제품이던 시절, 평범한 시민들은 은행이나 백화점같이 에어컨을 전기요금 걱정 없이 트는 곳을 찾아가 잠시 쉬기도 했다. 그러나 요즘은 코로나19로 재택근무를 해야 하고, 다중이용시설에 가기 꺼려진다. 무더위나 한파에 대응하기 위해 전세계 행정가들이 가장 먼저 내세웠던 쉼터는 감염병 앞에서는 무력해졌다. 1가구 1에어컨을 넘어 각방에 에어컨이 있는 시대지만, 에어컨 없이 여름을 견디는 이들은 여전히 주변에 많다.
올해 초 <한겨레> 신년기획 ‘기후위기와 인권’을 취재하면서, 초록우산어린이재단과 기초생활 수급가구(58가구)와 비수급가구(432가구) 성인들을 대상으로 기후위기 인식 조사를 벌였다. 수급가구의 수가 너무 적다는 이유로 기사에서는 크게 다루지 못했지만, 조사 결과는 마음에 무겁게 남았다.
복잡한 기후위기 현상을 이해하고 대응하는 데 소득 수준은 큰 영향을 줬다. ‘이미 기후변화로 인한 부정적 영향이 나타났나’ 묻는 질문에 비수급가구 성인들은 61%(263가구)가 ‘그렇다’고 답했다. 반면 수급가구는 36%(21가구)만이 끄덕였다. 인간의 화석연료 사용 등이 기후변화의 원인이라는 질문에 비수급가구는 93%(400가구)가 동의했지만, 수급가구는 72%(42가구)만 동의했다. 기후변화의 원인을 ‘자연현상’이라고 답한 비율은 비수급가구는 6%(26가구)에 그쳤지만 수급가구는 26%(15가구)나 됐다.
한국 사회에서 소득과 학력은 대체로 비례한다는 것을 고려할 때, 냉난방이 자유롭지 않은 에너지 빈곤층은 기후위기가 진행되고 있다는 과학자들의 말을 쉽게 수용할 것 같지 않아 보였다. 이런 인식이라면 정부나 기업의 기후위기 대응의 필요성에도 공감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았다. 안전하고 쾌적한 집을 갖지 못한 이들은 기후위기로 인한 피해를 입을 확률이 더 높은데도 말이다.
반면 최근 한국환경정책·평가연구원이 2012~2017년 국민환경의식조사 자료를 분석한 결과 한국인들은 나이가 많고 소득이나 교육 수준이 높을수록 친환경 생활에 대한 관심도가 높았다. 기후위기 피해 당사자와 기후위기에 적극 대응할 것을 요구하는 시민그룹은 이렇게 분리된다. 일부 지식인들이 환경 또는 기후운동을 두고 ‘당사자 운동’이 아닌 ‘엘리트 운동’이라고 낮게 평가하는 이유도 이러한 인식 격차에서 비롯된다.
시스템 에어컨이 방마다 설치된 신형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과 혼자 작은 방에서 선풍기 하나로 더위를 견디는 게 당연한 삶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은 무엇이 다를까. 고작 에어컨 하나의 차이 같지만 기후위기 문제에는 깊은 경제사회적 불평등이 숨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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