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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미얀마 민중이 덜 싸워 그런 건 아니다

등록 2021-07-22 11:56수정 2021-07-23 02:37

전명윤의 환상타파

전명윤 | 아시아 역사문화 탐구자

인도의 초대 법무부 장관을 지낸 암베드카르는 결국 수천의 불가촉천민들을 이끌고 수원지로 올라가 물을 떠먹었다. 종교적으로 오염된다는 이유로 당시만 해도 천민은 마을의 우물조차 사용할 수 없던 시절이다. 암베드카르는 보수 힌두교 윤리의 근본 경전과도 같던 마누법전을 불태웠다. 더는 기존 힌두교 질서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마지막으로 그는 수많은 천민과 함께 카스트를 인정하지 않는 불교로 개종했다. 암베드카르는 “나는 힌두교도로 태어났지만 힌두교도로 죽진 않겠다”는 결연한 말을 남겼다. 그는 불가촉천민 출신으로 인도의 헌법을 기초했으며, 카스트로 인한 차별 금지를 선언한 인도 헌법 15조를 남겼다.

그는 끊임없이 싸웠다. 그는 인도에서 차별을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싸운 사람의 앞자리에 서 있고 수백만의 인도인이 그의 뒤를 따르고 있다. 이 나라 저 나라 돌아다니며 두리번거리는 게 유일하게 할 줄 아는 일인 사람으로서 매번 그 나라에서 눈에 띄는 건 저항자 집단의 존재다. 그들은 우리가 약간의 관심만 기울인다면 당신이 서 있는 지점으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우리와 함께 숨 쉬고 있다. 물론 그 저항의 범위는 나라마다 다르고, 방향성도 조금씩 다르다. 한국에서의 식민지에 대한 일반적 인식에 견줘, 2019년 내내 정부와 싸웠던 홍콩 사람들의 생각은 조금 달랐던 탓에 많은 한국인은 홍콩인들의 민주화 요구 시위를 지지하면서도 성조기와 유니언잭을 흔드는 모습에 적잖은 의아함을 느꼈다. 1987년 이후 꾸준히 성장해온 우리의 민주주의가 추구하는 지향점과 달리 미얀마 사람들이 현재 생각하는 민주주의의 완성은 아웅산 수치의 집권일 뿐이다. 가까이서 보면 개인숭배가 아니냐는 의아함이 들 때도 많다. 한국의 민주주의는 이제 성숙기에 접어들었다고 한다. 눈부신 경제성장과 2차대전 이후 독립국으로서는 보기 드문 민주화까지. 이렇게 한국인들은 역경을 디뎠고 이제는 다른 나라의 사정을 살필 줄도 알게 되었다. 홍콩의 뉴스를 보면서 가슴 졸이고 미얀마의 군사 쿠데타를 보면서 애를 태운다. 하지만 그러는 도중 우리는 어느새 결승선에 도달한 사람처럼 세상을 바라보는 건 아닐까?

우리야 일본 제국주의가 유독 악독했다고 믿는 편이지만, 사실 아시아·아프리카의 식민지는 대부분 비참했다. 2차대전 중 인도에서는 ‘벵골 대기근’이라는 사건이 발생해 200만~300만명이 아사했다. 이런 일은 부지기수였고 우리보다 상황이 더 나쁜 지역도 허다했다.

우리는 일본이 한반도에 건설한 철도는 수탈 용도라도 명시하지만, 인도나 동남아를 두고선 때로 식민지 덕분에 철도라도 있다고 말한다. 우리만 피해자고, 다른 식민지는 심지어 수혜자라고 보는 불일치는 너무 흔한 풍경이라 사례를 헤아릴 수조차 없다.

나아가 세상의 모든 민주화 투쟁에 한국의 1980년을 대입하는 ‘실례’를 저지르기도 한다. 미얀마는 1988년 8888혁명 당시 3천명이 죽었다. 미얀마 상황을 보면 우리가 이룩한 민주화에는 상당한 행운도 따랐다는 걸 알게 된다. 미얀마가 오늘날까지 비참한 건 적어도 그들이 우리보다 덜 싸워서 그런 게 아니다.

이렇듯 수많은 나라의 사람들은 사실 우리와 같은 노상에 서서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싸우고 있고, 그 점에서 우리는 그들과 국경을 초월한 동지 관계에 있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는 심정으로 말하자면 일본의 양심 세력은 사실 우리의 동지일 뿐 아니라 한때의 선생들이기도 했다.

저항의 와중에 우리는 조금 빨리 갔고, 누군가는 더 나쁜 환경, 혹은 더 악독한 압제자로 인해 더디 가고 있다. 뒤처진 그들은 아직 승리하지 못했을 뿐이고 그렇기에 지금의 우리보다 더 치열하게 싸우고 있다. 그저 승리하지 못했다 하여 그 모든 저항이 폄하되어서는 안 된다. 싸우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을 응원하자. 우리는 그저 조금 더 빨리 걷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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