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정부 시절인 2005년 8월5일 필자는 내곡동 국정관에서 있었던 김승규 국가정보원장의 기자회견을 참담한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당시 김 원장은 이른바 “미림팀 불법감청사건”의 수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국민들께 불안감과 실망을 안겨드린 데 대해 사과와 용서’를 구하는 대국민 사과 말미에 ‘국가와 역사 앞에 부끄럽지 않은 정보기관으로 거듭날 것’을 약속하였다. 정보기관 설립 최초의 일이었다. 이게 가능했던 것은 당시 노무현 대통령이 김 원장에게 철저한 진실규명과 검찰수사 협조를 지시했기 때문이었다. 그 결과 김대중 정부 시절의 신건, 임동원 원장은 불법감청 결과를 보고받았다는 이유로 형사처벌을 받았다.
10년이 지난 지금 박근혜 정부의 국정원은 ‘불법해킹사찰 의혹’으로 또다시 대한민국을 뒤흔들고 있다. 새누리당은 국정원의 충실한 대변인 역할을 넘어 호위무사를 자처하며 쟁점을 흐리고 있다. 새정치민주연합은 검찰 고발 등 공세를 취하고 있으나 여전히 국정원은 불법사찰을 전면 부인하며 ‘직원 일동’ 성명과 ‘셀프 검증’으로 맞서고 있다.
이렇게 박근혜 대통령의 국정원이 보이는 태도가 참여정부의 국정원과 다른 이유는 무엇인가? 정부조직법상 국정원은 오로지 대통령의 지시만을 받고 있다는 점에 비추어 보면, 박근혜 대통령이 이병호 국정원장에게 철저한 진실규명과 검찰수사 협조를 지시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만약 박 대통령이 국민의 불안감을 해소하고 국정원의 신뢰 회복을 원한다면 즉각 이 원장에게 특별지시를 내려 철저한 진상을 국민에게 밝혀야 한다. 그러나 박근혜와 이명박 정부의 국정원이 하는 행태를 보면 이런 기대를 접어야 할 것 같다. 국내정치에 개입하고 정쟁의 한복판에 서는 일이 많았다. 2012년 사이버심리전단의 댓글 대선 개입, 2013년 북방한계선(NLL) 대화록 유출 및 공개, 2014년 서울시 공무원 간첩 및 증거조작 사건 그리고 2015년 ‘불법해킹사찰 의혹’ 사건이 그것이다.
선진국의 정보기관에선 있지도 않을 사건이 왜 반복되는가? 노무현 전 대통령은 참여정부 출범 초기 검찰과 국정원 등 권력기관에 대해 “탈권력, 탈정치화”를 지시하였다. 국정원장의 독대보고 관행을 없앴다. ‘국정원 비전 2005’의 개혁 방안과 ‘국정원 과거사발전위원회’를 통해 어느 정도 국정원 개혁에 성과가 있었다고 자평하였다. 그러나 지금의 국정원 행태를 보면 근본적인 제도개혁이 아닌 대통령의 선한 의지와 부분적인 조직개편만으로는 국정원의 국내정치 개입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이 여실히 드러났다. 참여정부 당시 시민단체는 국정원의 국내정치 개입 문제를 원천적으로 차단하기 위하여 해외와 국내 부문 조직의 분리, 수사권 폐지, 예산 및 국회의 통제 강화 방안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당시 국정원은 본질적인 문제는 방기한 채 ‘국내정보, 안보수사, 심리전 재정립’ 등의 10대 중점과제를 제시하며, 일부만 수용하였다. 이후 보수정부 국정원은 이러한 개선 방안마저 폐기하며, ‘국가정체성 확립’이란 허울 뒤에 ‘종북좌파 척결’을 내세워 대선 개입과 국내정치 문제에 적극 개입하는 국가기강 문란 행위를 초래했다.
지금이 국정원을 안보와 국익에만 전념하는 우수한 정보기관으로 바로 세우기 위해 근본적인 제도개혁에 나설 적기이다. 근본적인 국정원 개혁 방안은 해외와 국내 부문의 분리로 정보기관 상호 간에 견제와 균형을 이루고, 정보기관의 대공수사권을 전문수사기관에 이관하는 것이다. 이 방안은 국정원의 전신인 중앙정보부를 창설한 김종필 전 총리가 “국정원이 정치에 개입하는 건 수사권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는 최근의 회고에 의하여 그 타당성이 입증된다. 또한 지금의 박근혜 대통령도 2005년 한나라당 비대위원장 시절 국정원의 근본적인 제도개혁을 요구한 바 있다. 박근혜 대통령과 새누리당은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서 올바른 국정원을 바로 세우려면 참여정부 국정원 개혁의 한계를 넘어서는 근본적인 제도개혁만이 그 해결책임을 인식해야 한다. 이번 ‘불법해킹사찰 의혹’의 진실규명과 책임자 처벌이 해결책의 출발점이 될 때 비로소 국민들은 박근혜 정부 국정원 개혁의 진정성을 믿어줄 것이다.
일부 보수세력들은 국정원 개혁을 요구하면 마치 국가안보를 도외시하고 국정원의 기능을 마비시켜 북한을 이롭게 하는 것처럼 호도하고 있다. 그러나 국정원 개혁을 요구하는 시민단체들도 역시 국민의 기본적 인권 못지않게 국가안보의 중대성을 간과하지 않는다는 점을 덧붙이고 싶다.
이석범 변호사·전 국정원 법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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