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동욱 검찰총장은 처음 취임하면서 스스로 백의종군을 끝내고 전장으로 돌아온 충무공의 심정에 빗대며 비장한 각오를 밝힌 바 있다. 그 후 채 총장이 국가정보원 댓글 사건의 주범인 원세훈 전 국정원장과 김용판 전 서울경찰청장을 선거법 위반으로 기소했을 때 그가 임기를 채우지 못할 것이라는 불길한 예측은 법조계와 정치권에 널리 퍼졌다.
아니나 다를까. 국정원과 같은 정보기관이 아니면 알 수 없는, 보수언론의 난데없는 혼외자 보도에 이은 사퇴 종용, 그리고 황교안 법무부 장관의 감찰 지시까지 정권 핵심은 채 총장에게 대놓고 나가라는 사인을 보냈다. 아주 치사한 방법으로. 채 총장에 대한 의혹이 사실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임기가 정해진 검찰총장을 법적 절차 없이 언론을 동원해 의혹을 키우고 사퇴 압박을 하는 구시대적 공작통치 방식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눈 밖에 난 검찰총장을 찍어 쫓아내려 하는 걸 보면서 남아 있는 공직자들은 무슨 생각을 하며 앞으로 어떤 처신을 하게 될까. 공직자로서의 자부심을 갖고 소신과 원칙을 지키며 묵묵히 일해 온 공직자들의 기개는 땅에 떨어지고 자괴감에 절망할 것이다.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를 지켜라’는 경구를 목숨처럼 소중히 간직해 온 검사들은 총장의 뒤를 이어 검찰을 떠나거나 정의감을 내던지고 권력자에게 잘 보이는 생존법에 따라 해바라기를 해야만 할 것이다. 공권력의 대표이자 수호자여야 할 검사가 영혼 없이 살 것을 강요당하고 있는 것이다.
직업공무원제도라는 헌법적 기본질서는 그렇게 무너지는 것이다. 권력자가 바뀌어도 국가를 안정적으로 운영하기 위해 정치적 중립성과 공직자의 신분 보장을 하고 있는 기본 이유도 무너진다. 이것이 바로 민주주의 기본질서의 붕괴이다. 국정원이 정치에 직접 개입하여 여론을 왜곡하는 것만큼이나, 어쩌면 그보다 더 크게 민주주의 기본질서를 무너뜨리는 위험이다.
민주주의뿐 아니라 법치주의도 무너졌다. 채 총장에 대한 법무부 장관의 ‘감찰 지시’는 법무부 감찰규정조차 위반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법무부 감찰관은 해외 출장중이었다고 하는데, 문서에 의한 정당한 행정행위로서의 ‘감찰 지시’였는지도 의문이다. 법치주의라는 것은 국민에게 준법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 행사가 법에 의하여 이루어질 때 바로 설 수 있다. 법치주의가 무너지면 그것은 곧바로 권력 남용으로 이어진다.
이명박 정부에서부터 시작된 이러한 막무가내식 권력 남용이 박근혜 정부에 이르러 현직 검찰총장을 찍어 내쫓으려 하는 극단적 행태로 이어지고 있다. 그 치사한 수법에 치가 떨릴 만큼 분노가 치민다. 법조인의 한 사람으로서 정의와 원칙, 헌법적 가치가 쓰레기처럼 내동댕이쳐지는 것을 차마 눈 뜨고 볼 수가 없다. 이런 치졸한 행태를 꼭 대통령이 외국에 있는 동안 벌이는 걸 보면 비겁하기까지 하다.
20년 전, 30년 전 군사정부와 권위주의 정부 시대에서나 보이던 후진국형 정치 행태가 21세기에 버젓이 되살아나고 있다. 20여년 전 권력을 휘두르던 사람이 대통령 비서실장으로 다시 등장한 것과 연결시키는 것은 이유 있는 추론이다. 민주주의를 위해 젊음을 다 바쳐왔는데 중년을 넘기면서 나라꼴이 거꾸로 돌아간다는 한탄이 곳곳에서 일어난다.
민주주의 기본질서가 무너진 곳에서 민생을 살릴 해법은 나올 수가 없다. 그래서 민주주의는 국민 생존의 문제이다. 권력의 횡포 앞에 국민의 자발성은 움츠러들 수밖에 없다. 숨 막히도록 절망적인 밤이다. 캄캄한 어둠보다 대한민국의 장래가 더욱 어두우니 통탄할 일이다.
송호창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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