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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일본

‘10억엔’과 함께 봉인된 위안부 25년 외침

등록 2016-08-14 19:03수정 2016-08-14 20:58

[뉴스분석] 12·28합의 마무리 수순
1991년 첫 피해 증언 이후
시민사회 노력 물거품 만들어
미·일 압박에 정부의 무능
반성없는 일본에 ‘면죄부’ 내줘

“(일본이 지급하는 10억엔이) 배상금이 아니라는 사실을 한·일 양국 정부가 확인했나?”(일본 기자)

“위안부에 관한 청구권 문제는 이미 해결됐다는 (일본의) 입장은 전혀 변함이 없다.”(기시다 후미오 일본 외무상)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지난해 12·28 합의에 따라 일본 정부가 지급하기로 약속한 10억엔을 “되도록 빨리 지급하겠다”는 기시다 외무상의 12일 기자회견에서 일본 기자들이 집중적으로 캐물은 것은 10억엔의 성격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이었다. 일본 기자는 10억엔이 ‘배상금’이 아니라는 사실을 한국 정부에 확인시켰냐고 물었고, 기시다 외무상은 “일본 정부 기존 입장에 변화가 없다”고 말했다. 이 짧은 문답 속에 12·28 합의의 성격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위안부 문제를 둘러싸고 한-일 양국 정부 사이에서 진행된 지난 5년 동안의 공방은 미-중 갈등이 점차 표면화되는 동아시아 질서 속에서 한국의 국력과 자율성의 범위를 명확히 보여준 외교사적 사건으로 기록될 것으로 보인다.

한국에서 위안부 문제가 처음 주요한 사회적 문제로 불거진 것은 1991년 8월14일 김학순 할머니의 역사적 기자회견 이후다. 한국의 피해자들은 1980년대 말 민주화 이후 일본 정부를 상대로 본격적인 배·보상 운동에 나서게 된다. 이런 외침에 일본 정부가 내놓은 ‘철옹성’ 같은 입장은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에 따라 개인 청구권은 소멸됐다”는 것이다. 일본 정부는 다만, 여성에 대한 씻을 수 없는 범죄인 위안부 문제에 대해선 일본의 ‘법적 책임’이 아닌 ‘도의적 책임’만을 인정하는 ‘아시아 여성기금’(1995~2007)이라는 절충안을 제시했다. 위안부 문제에 대한 1차 봉인이었다.

이후 20여년에 걸친 피해 할머니들과 한국 시민사회의 끈질긴 투쟁이 이어졌다. 한국 시민사회는 다양한 국제연대를 통해 ‘위안부는 성노예이고, 위안부 제도는 일본의 전쟁 범죄’라는 국제사회의 상식을 형성해 갔다. 이와 함께 국내적으로 한일협정 문서 공개 운동 등을 벌였다. 이를 통해 한국 정부는 2005년 8월 △위안부 △사할린 △피폭자 문제 등 3개 현안은 “한일협정으로 해결되지 않았다”며 기존 견해를 수정한다. 헌법재판소도 2011년 8월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정부가 일본과 외교적 교섭을 하지 않는 것은 ‘위헌’이라는 결정을 내놓는다. 이로 인해 위안부 문제에 대한 ‘1차 봉인’이 해체됐다.

10일 서울 종로구 옛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제4차 세계 일본군 위안부 기림일 세계연대집회 및 1243차 일본군 위안부 문제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집회’에 김복동 할머니가 참석하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10일 서울 종로구 옛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제4차 세계 일본군 위안부 기림일 세계연대집회 및 1243차 일본군 위안부 문제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집회’에 김복동 할머니가 참석하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이런 국민적 열망을 이어받은 박근혜 정권은 2013년 2월 취임 이후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의 “성의있는 선조처”를 요구하며 아베 신조 정권과 강력히 대립했다.

그러나 한국 정부가 독자 외교를 밀어붙일 수 있는 한계는 여기까지였다. 격해지는 미-중 대립 속에서 미국은 2013년 10월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을 환영”한다는 입장을 발표했고, 2015년 봄이 되자 미국 고위 관료들은 “세 나라(한·미·일)는 미래에 눈을 돌려야 한다”(4월 애슈턴 카터 미 국방장관) 등의 발언을 쏟아낸다. 결국 한국 정부는 지난해 8·15 경축사에서 일본의 지난 식민지배에 대해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은 모욕적인 ‘아베 담화’를 받아들이며 관계 개선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 논리적 연장선상에 12·28 합의가 있다. 이 합의로 피해자들의 당연한 요구들이 2차로 봉인됐다.

신경분(84, 왼쪽), 이윤재(71) 할머니가 23일 오후 서울 종로구 재동 헌법재판소 대심판정에 앉아 한일청구권협정 헌법소원에 대한 판결을 기다리고 있다. 김성광 기자 flysg2@hani.co.kr
신경분(84, 왼쪽), 이윤재(71) 할머니가 23일 오후 서울 종로구 재동 헌법재판소 대심판정에 앉아 한일청구권협정 헌법소원에 대한 판결을 기다리고 있다. 김성광 기자 flysg2@hani.co.kr
한국 정부는 이를 ‘위안부 문제 해결’이라는 말로 포장했지만, 피해자들과 국민들의 강한 반발에서도 알 수 있듯 외교적 패배라는 게 일반적 시각이다. 12일 기시다 외무상의 발언을 보면, 그나마 남은 협상도 녹록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기시다 외무상은 12일 일본이 지급하는 10억엔에 대해 “일·한 정부가 합의하는 용도의 범위” 내에서만 사용할 수 있다고 말했고, 이 자금은 “사업을 하기 위한 지출”이라며 피해 할머니 개인에게 일시금으로 지급되지 않게 하겠다는 의사를 거듭 밝혔다. 우리가 마음대로 쓸 수 없는 10억엔을 받는 조건으로 위안부 문제가 ‘최종적, 불가역적’으로 해결된 상황에 이른 것이다. 한국 사회가 해방 이후 71년 동안 이뤄낸 성취들이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과 일본의 역사 수정주의, 그리고 박근혜 정권의 몰역사성 앞에 물거품이 되는 듯한 모양새다.

도쿄/길윤형 특파원 charism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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