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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일본

윤 정부, 일본에 ‘백기투항’…강제동원 피해자 30년 투쟁 짓밟다

등록 2023-03-08 05:00수정 2023-03-08 17:45

[뉴스 분석] 강제동원 배상안이 굴욕적인 이유
박진 외교부 장관이 6일 서울 종로구 외교부 청사에서 2018년 대법원의 배상 확정판결을 받은 국내 강제징용 피해자들에게 행정안전부 산하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이 조성한 재원으로 판결금을 대신 변제하는 방안을 발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박진 외교부 장관이 6일 서울 종로구 외교부 청사에서 2018년 대법원의 배상 확정판결을 받은 국내 강제징용 피해자들에게 행정안전부 산하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이 조성한 재원으로 판결금을 대신 변제하는 방안을 발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2018년 10월 대법원 판결 이후 4년 반 동안 이어졌던 강제동원 피해자의 배상 문제를 둘러싼 한-일 갈등은 지난 6일 윤석열 정부의 ‘백기 투항’으로 마무리됐다. 일본으로부터 지난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인정받고 정당한 사죄와 배상을 받아내겠다는 한국 시민사회의 치열했던 전후 보상 투쟁 역시 ‘거대한 실패’로 마무리될 위기에 놓였다. 1965년 한-일 협정, 2015년 말 ‘위안부’ 합의에 이어 한-일 역사 갈등을 정의롭게 해결하려는 한국인들의 열망에 찬물을 끼얹은 ‘3차 봉인’이라 할 수 있다.

대한민국은 해방 뒤 일본과 국교를 재개하는 과정에서 지난 식민지배에 대한 불법성을 인정받기 위해 무려 13년8개월에 걸친 처절한 협상을 이어갔다. 그 결과는 1965년 6월22일 도쿄에서 정식 서명된 ‘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기본관계에 관한 조약’ 2조에 담겼다. 한-일은 “1910년 8월22일(병합조약) 및 그 이전에 대한제국과 대일본제국 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을사조약 등) 및 협정이 ‘이미’ 무효임을 확인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1965년 12월18일 이동원 외무장관(왼쪽 넷째)과 시나 에쓰사부로 일본 외상(오른쪽 셋째)이 정부청사 장관실에서 한-일 협정 발효를 축하하며 축배를 들고 있다. 협정 체결은 이에 앞서 1965년 6월22일 도쿄의 일본 총리관저에서 이뤄졌다. <한겨레> 자료사진
1965년 12월18일 이동원 외무장관(왼쪽 넷째)과 시나 에쓰사부로 일본 외상(오른쪽 셋째)이 정부청사 장관실에서 한-일 협정 발효를 축하하며 축배를 들고 있다. 협정 체결은 이에 앞서 1965년 6월22일 도쿄의 일본 총리관저에서 이뤄졌다. <한겨레> 자료사진

별다른 특색이 없어 보이는 이 문장은 아슬아슬한 긴장 속에서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 한국은 “(지난 조약이) 무효임을 확인한다”는 구절을 ‘병합조약 등은 처음부터 불법·무효’였다고 해석한 데 견줘, 일본은 ‘이미’란 부사어를 통해 ‘원래는 합법·유효했지만, 일본의 항복과 한국의 건국으로 1965년 현재 무효가 됐다’고 해석했다. 해결이 불가능한 역사 문제를 미봉한 고육책이었다. 그 대가로 한국은 일본으로부터 무상 3억달러, 유상 2억달러의 청구권 자금을 받아들여 이후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게 되는 경제 개발의 틀을 잡았다.

두번째 봉인은 2015년 12월 이뤄졌다. 1차 봉인의 두꺼운 벽을 깨뜨린 것은 1991년 8월 자신이 위안부였음을 처음 밝힌 김학순(1924~1997) 할머니의 외로운 외침이었다. 이후 위안부 피해자들의 고통에 공감하고, 이들의 명예를 회복하며, 일본 정부로부터 올바른 사죄를 받아내는 일은 한국 사회가 반드시 이뤄내야 할 ‘시대적 과제’가 됐다.

하지만 한-일 청구권 문제는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됐다”고 선언한 1차 봉인의 벽은 높고 두꺼웠다. 일본 정부는 1995년 7월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 국민기금’(여성기금)을 만들었지만, ‘65년 체제’를 이유로 “정부 예산은 투입할 수 없다”고 버텼다. 한국 사회는 위안부 문제가 국가 범죄임을 인정하지 않은 채 ‘도의적 책임’만을 인정한 ‘여성기금’을 거부했다. 한국 시민사회는 치열한 법적 투쟁 끝에 2011년 8월 일본 정부와 교섭하지 않는 한국 정부의 ‘부작위’는 위헌이라는 역사적인 헌법재판소 결정을 손에 넣게 된다.

2015년 12월28일 당시 윤병세 외교부 장관(오른쪽)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외무상이 서울 세종로 외교부 청사에서 각자 발언하는 형식으로 일본 정부의 책임 인정 등 위안부 피해자 문제의 해결 방안과 관련한 공동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김봉규 선임기자
2015년 12월28일 당시 윤병세 외교부 장관(오른쪽)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외무상이 서울 세종로 외교부 청사에서 각자 발언하는 형식으로 일본 정부의 책임 인정 등 위안부 피해자 문제의 해결 방안과 관련한 공동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김봉규 선임기자

이후 한·일 두 나라는 4년에 걸친 살벌한 외교 협상 끝에 2015년 말 ‘12·28 합의’에 도달했다. 아베 신조 전 총리는 그동안 인정해온 ‘도의적 책임’에서 한발 더 나아가 일본의 “책임을 통감한다”고 선언했고, 10억엔(약 108억원)의 정부 예산을 기금에 출연했다. 한국은 그 대가로 위안부 문제를 “최종적·불가역적으로 해결”한다는 문구를 삼켜야 했다. 이 합의는 한국 입장에선 아쉽기 짝이 없는 타협이었지만, 성과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합의가 공개된 뒤 일본의 극우 인사 사쿠라이 요시코는 “너무나 분하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윤석열 정부는 최선의 외교적 노력을 기울여 최소한의 ‘이익의 균형’을 맞추려 노력하는 대신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30여년에 걸친 투쟁의 성과인 대법 판결을 스스로 폄훼했다. 6일 브리핑에 나선 대통령실 당국자는 이 판결에 대해 “국제법적으로 그리고 65년도 한·일 양국 정부의 약속에 비추어 보면, 일본은 한국이 합의를 어긴 것이라는 결론”을 얻게 됐다고 말했다. 대통령실 당국자가 공식 브리핑에서 대법 판결을 옹호하는 대신 일본의 입장을 두둔한 것이다.

그 결과 지난해 7~9월 민관위원회의 결론이었던 일본 기업들의 ‘사과’와 ‘배상 참여’라는 목표를 실현하려는 외교부 실무자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대법 판결의 취지를 허무는 안이하고 굴욕적인 길을 택했다. 자민당의 한 중진 의원은 7일 <산케이신문>에 “일본의 완승이다. 아무것도 양보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윤석열 정부가 택한 3차 봉인의 어이없는 귀결이었다.

윤석열 대통령(오른쪽)이 지난해 11월 캄보디아 프놈펜의 한 호텔에서 열린 한-일 정상회담에서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와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대통령실 제공
윤석열 대통령(오른쪽)이 지난해 11월 캄보디아 프놈펜의 한 호텔에서 열린 한-일 정상회담에서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와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대통령실 제공

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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