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1일 서울 중구 유관순기념관에서 열린 제104주년 3·1절 기념식에서 기념사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일본 정부의 사과와 일본 가해 기업의 배상 참여가 없는 정부의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자 ‘셀프 배상안’ 발표에는 윤석열 대통령의 밀어붙이기가 결정적 작용을 했다는 정황이 여러군데에서 확인되고 있다. 이 사안의 주무 부처인 외교부는 물론, 전직 보수 외교 원로들도 한-일 관계의 민감성과 역사성 등을 고려해 ‘속도 조절’을 권유했으나 윤 대통령은 ‘나 홀로 직진’을 멈추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7일 <한겨레> 취재를 종합하면, 외교부는 지난해 11월 일본 외무성과 강제동원 피해 배상 문제에 관한 공식 협상 시작 때부터 △일본 정부의 사과 △일본 가해 기업(일본제철·미쓰비시중공업)의 배상 참여를 최저 요구선으로 삼았다. 외교부는 최악의 경우에도 둘 중 하나는 관철해야 한다는 협상 방침을 막바지까지 고수했다. 하지만 지난 6일 정부가 최종적으로 발표한 ‘제3자 변제안’(일본 기업이 아닌 행정안전부 산하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이 대신 변제)에는 두가지가 모두 빠졌다. 복수의 정부 관계자들은 “대통령께서 정말 세게 밀어붙였다”고 말했다.
‘강제동원 정부 해법 강행 규탄 및 일본의 사죄배상 촉구 긴급 시국선언’이 7일 오후 국회 본청 앞에서 열려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자인 김성주·양금덕 할머니(앞줄 왼쪽부터)와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둘째 줄 오른쪽 셋째), 이정미 정의당 대표(둘째 줄 왼쪽 셋째) 등 참석자들이 정부 해법 철회와 일본 기업의 사죄 등을 촉구하고 있다. 김경호 선임기자
외교부는 지난해 11월24일 일본 도쿄에서 한 한-일 국장급 협의에서 ‘일본의 사과와 배상 참여’를 타진했으나 일본 쪽은 거부했다. “현안 조속 해결”에 공감한 윤 대통령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의 캄보디아 프놈펜 정상회담(11월13일) 직후였다.
외교부는 협상안을 바꾸지 않았다. 외교부 당국자는 윤석열 정부가 ‘제3자 변제안’을 공론화한 나흘 뒤인 지난 1월16일 도쿄 한-일 국장급 협의 직후에도 “사과와 성의 있는 호응 조치가 필요하며, 그래야 (한국 정부가 해법을) 발표할 수 있다”고 일본 쪽에 말했다고 기자들에게 밝혔다. 그 뒤 외교부는 대통령실 국가안보실의 압박에 ‘둘 중 하나는 반드시 얻어내야 한다’는 쪽으로 대일 협상안을 후퇴·조정했다. 2월 중순까지만 해도 박진 외교부 장관은 “일본 기업이 (피해자 배상) 기금에 참여하지 않으면 협상을 깰 각오로 임하고 있다”고 말했다고, 익명을 요구한 한 한-일 관계 전문가가 <한겨레>에 전했다. 그러나 외교부의 저항은 “일본은 군국주의 침략자에서 협력 파트너로 변했다”는 윤 대통령의 3·1절 경축사로 무력화됐다.
윤 대통령의 선택은 보수 성향의 외교 원로들의 조언과도 달랐다. 이명박 정부에서 외교부 장관을 지낸 이를 포함한 보수 원로들은 “일본 정부 사과와 피고 기업 배상 참여를 협상의 최저선으로 삼아야 한다. 서둘지 말라”고 마지막 순간까지 경고했다고 한다. 한 전직 외교부 장관은 “서두르다 아무것도 얻지 못하면 ‘위안부’ 합의 때보다 심한 갈등으로 한-일 관계가 더 나빠질 수 있다는 취지의 우려를 정부 쪽에 지속적으로 전했다”고 말했다. 이들은 2015년 12월28일 한-일 정부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 합의·발표와 관련해 박근혜 정부의 대일 협상안의 기본 구상을 제안했던 주요 인물들이다. 이들마저 우려한 ‘제3자 변제안’을 윤 대통령의 의지로 밀어붙인 것이다. 앞서 신각수 전 외교부 차관도 지난달 <동아일보> 인터뷰에서 “외교라는 건 시점을 정해놓고 하는 쪽이 지는 것이다. (윤 대통령) 방일에 맞추려 서둘러선 안 된다”고 말했다.
윤 대통령은 ‘제3자 변제안’ 발표 당일인 지난 6일 대통령실 참모들에게 “외교와 안보, 국방, 이 모든 정책의 책임은 대통령인 내게 있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일 관계에 깊이 관여해온 외교안보 분야 원로는 “윤석열 정부가 6일 발표로 일본에 꽃놀이패를 쥐여준 꼴”이라고 말했다.
이제훈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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